쑨원 “도적 두목부터 잡듯 군벌 타도는 즈파 제거로 시작”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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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16호 29면

사진과 함께하는 김명호의 중국 근현대 〈656〉

2차 즈펑전쟁 막바지 톈진에 모인 펑파와 완파 지휘관. 왼쪽 둘째부터 펑위샹, 장쭤린, 돤치루이, 루융샹, 장쭤린의 참모장 양위팅(楊宇霆). 펑위샹은 즈파였지만 베이징에 진입해 정변을 일으키고 총통 차오쿤을 연금시켰다. [사진 김명호]

2차 즈펑전쟁 막바지 톈진에 모인 펑파와 완파 지휘관. 왼쪽 둘째부터 펑위샹, 장쭤린, 돤치루이, 루융샹, 장쭤린의 참모장 양위팅(楊宇霆). 펑위샹은 즈파였지만 베이징에 진입해 정변을 일으키고 총통 차오쿤을 연금시켰다. [사진 김명호]

1922년 6월 즈펑(直奉)전쟁에서 승리한 즈파는 새 판을 짰다. 정통성을 회복하겠다며 5년간 열리지 않았던 국회를 소집했다. 의원들은 고분고분했다. 투표로 총통 쉬스창(徐世昌·서세창)의 옷을 벗겼다. 6년 전 완(晥)파 군벌 영수 돤치루이(段祺瑞·단기서)에게 밀려났던 전 총통 리위안훙(黎元洪·여원홍)을 복직시켰다.

즈펑전쟁서 이긴 즈파 영수 차오쿤 #5년 만에 국회 열어 새 판짜기 나서 #절치부심한 장쭤린은 완파와 연합 #차오쿤 아들에게 시집간 딸 데려와 #쑨원 요청에 장쭤린이 보낸 지원금 #돤치루이가 즈파 분열 공작비로 써

리위안훙은 즈파 영수 차오쿤(曹錕·조곤)이 총통에 선출되기까지 허수아비에 불과했다. 베이징 정부의 군정 대권은 차오쿤과 우페이푸(吳佩孚·오패부)가 쥐고 있었다. 1년이 지나자 즈파는 리위안훙을 압박했다. 총통 관저에 보급을 중단하고 경비초소도 없앴다. 반응이 없자 전화선을 절단했다. 수도관도 잠가버렸다. 리위안훙은 총통 직인 챙겨 들고 베이징을 떠났다. 도중에 시골 역에 감금되자 직인 내놓고 자유를 찾았다.

차오쿤, 의원 500명에 5000위안씩 뿌려

연금 중인 차오쿤. 1924년 10월 29일 중난하이(中南海) 옌 칭러우(延慶樓). [사진 김명호]

연금 중인 차오쿤. 1924년 10월 29일 중난하이(中南海) 옌 칭러우(延慶樓). [사진 김명호]

차오쿤은 의원들을 다룰 줄 알았다. 500명에게 5000위안(元)씩 뿌렸다. 노부모가 있거나 장인 장모가 여럿인 의원들에겐 효도비용으로 1만 위안을 지불했다. 민주적인 절차로 집권한 즈파는 호감을 샀다. 즈펑전쟁을 지휘한 우페이푸 찬양과 패배자 장쭤린(張作霖·장작림) 조롱이 그치지 않았다. “우페이푸는 수재 출신이다. 장마적과 비교하지 마라. 우 수재는 우리 같은 없는 사람편이다.” 차오쿤과 우페이푸는 민중이 변덕쟁이라는 것을 깜빡했다. 철도 노동자 파업을 가혹하게 진압하자 환호가 원성으로 변했다. 차오쿤은 우페이푸에게 책임을 돌렸다. 허난(河南)성으로 좌천시켰다.

장쭤린은 2년간 절치부심(切齒腐心)했다. 민심이 즈파를 떠나자 기지개를 폈다. 차오쿤의 아들에게 출가시킨 딸부터 펑톈으로 불러들였다. “차오쿤 집안과는 인연이 끝났다. 너를 개떡 같은 놈의 아들과 결혼시킨 내 잘못이 크다. 동북에는 똑똑하고 잘생긴 청년들이 널려있다. 다시 골라 줄 테니 걱정 마라.” 광둥(廣東)에 군정부 간판 내건 쑨원(孫文·손문)과 톈진(天津)에 은거 중인 완파 영수 돤치루이, 저장(浙江)성을 장악하고 있던 완파 루융샹(盧永祥·노영상)과도 연합을 시도했다. 장쭤린의 밀사들이 펑톈과 광둥을 오가기 시작했다.

당시 쑨원의 구상도 장쭤린과 별 차이 없었다. 측근들에게 이런 말을 자주 했다. “즈파와 완파의 이해가 충돌하면 돤치루이와 손을 잡아야 한다. 관외 세력인 장쭤린의 역할이 중요하다. 세 세력이 합작하면 차오쿤과 우페이푸를 제압할 수 있다. 즈파는 가장 강한 군벌이다. 도적을 잡으려면 두목부터 잡아야 한다. 군벌 타도는 즈파 타도로 시작해야 한다.”

중일전쟁 초기였던 1939년 12월 중순, 우페이푸의 장례행렬. 베이징 시민들은 일본의 유혹을 끝까지 뿌리친 무성(武聖) 우페이푸의 만절(晩節)을 높이 샀다. [사진 김명호]

중일전쟁 초기였던 1939년 12월 중순, 우페이푸의 장례행렬. 베이징 시민들은 일본의 유혹을 끝까지 뿌리친 무성(武聖) 우페이푸의 만절(晩節)을 높이 샀다. [사진 김명호]

쑨원은 최측근 왕징웨이(汪精衛·왕정위)를 두 차례 동북에 파견했다. 장쭤린은 장남 장쉐량(張學良·장학량)과 함께 쑨원의 후계자나 다름없는 왕징웨이를 후대했다. 중국정치협상회의 기관지에 실린 전 동3성 보안사령부 참모의 구술을 소개한다. “장쭤린은 국부의 특사를 위해 성대한 연회를 열었다. 각계 인사를 초청한 자리에 대례복 입고 직접 참석했다. 왕징웨이는 거침이 없었다. 남방의 혁명정부가 차오쿤과 우페이푸 토벌령을 내리면 펑톈군은 베이징을 향해 진격하자며 기염을 토했다. 장쭤린은 동의하면서도 개별 행동에 못을 박았다. 승리 후 국가의 통일과 건설 문제는 아무래도 좋다며 의견을 말하지 않았다. 차오쿤과 우페이푸만 토벌하면 된다는 말만 계속했다.”

쑨원은 망명 시절부터 모금전문가였다. 장쭤린에게도 서신을 통해 손을 내밀었다. “병력 유지에 초석이 되어주기를 갈망한다.” 생활비 지원도 청했다. 장쭤린은 동3성병공창장 한린춘(韓麟春) 편에 10만 위안을 보냈다. 10만 위안은 거액이었다. 한린춘이 동3성병공창  설립에 필요한 장비 구입비와 같은 액수였다. 군비 50만 위안과 예비비 70만 위안도 거절하지 않았다.

쑨원, 동북 특사로 최측근 왕징웨이 파견

장쭤린과 돤치루이는 평소 험악한 사이가 아니었다. 계파 투쟁이 벌어질 때마다 장쭤린은 돤치루이 편을 들었다. 차오쿤과 우페이푸에게 보복하려면 돤치루이의 지원이 절실했다. 즈파와의 전쟁에 패한 후 베이징의 골목에서 당구와 독일어 공부에 열중하던 돤에게 300만 위안을 보냈다. 돤치루이는 이 돈을 즈파 분열에 썼다. 허난성의 즈파 영수 펑위샹(馮玉祥·풍옥상)에게 200만 위안을 지원했다.

1924년 9월 7일, 장쭤린은 동3성 보안총사령부로 펑톈 주재 미국, 일본, 영국, 독일 영사를 불렀다. 자위를 위해 즈파와의 전쟁을 결심했다고 선언했다.

9월 10일, 동3성 육군의원을 동3성전시총병원으로 개조했다. 2차 즈펑전쟁의 막이 올랐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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