검색결과
  • (424)제26화 경무대 사계(51)

    이박사가 국군수뇌들에게 38선 돌파명령을 내리기 직전 맥아더 사령관은 그 나름대로 결심을 했다. 맥아더 원수는 적을 완전히 섬멸하기 위해서는 38선을 넘는 것이 불가피하다고 판단

    중앙일보

    1972.04.03 00:00

  • 민족의 증언 목차|4월3일로 총 310회 연재

    ▲가장 길었던 3일(37회) ①=전선과 경무대표정 ②=토요일의 심야 파티 ③=육본의 대책 ④=심야의 비상각의 ⑤∼⑦=국회의 수도사수결의 ⑧=정훈국과 KBS ⑨=대통령의 전화방송 ⑩

    중앙일보

    1972.04.03 00:00

  • (423)경무대 사계(50)|황규면(제자는 윤석오)

    경무대를 나선 이 박사는 자동차를 남대문 쪽으로 달리라고 했다. 우선 중심가주변의 시민동향을 알아보기 위해서였다. 남대문근처에 이르자 이 박사를 본 시민들은 길거리와 주변을 정리

    중앙일보

    1972.04.01 00:00

  • (422)경무대 사계(49)황규면

    김포에서 비행기를 내려 자동차를 타고 서울로 들어가는 길은 홍진만장이었다. 90일간의 전쟁이 남긴 상흔은 말할 것도 없고 화약냄새가 코를 찔렀다. 그러나 비록 폐허뿐이지만 옛집을

    중앙일보

    1972.03.31 00:00

  • (421)경무대사계(48)황규면

    부산 피란 시절의 대통령관저는 경남 도청 뒤에 자리잡은 지사관사였다. 이대통령은 이 지사관사의 조그마한 방에서 집무했다. 너무도 초라한 집무실이어서 우리비서들이 민망할 정도였다.

    중앙일보

    1972.03.30 00:00

  • (420)경무대 사계(47)황규면

    정부가 대구로 옮겨진 후 낙동강전선은 적의 계속된 공세로 위험한 지경에 빠졌다. 괴뢰군은 왜관·성주 등지에서 대구를 향해 집중포격을 가해와 문자 그대로 함락작전의 위험에 빠졌다.

    중앙일보

    1972.03.29 00:00

  • (419)(46)황규면

    이대통령이 부산에 도착한 다음날 우리는 신 국방장관으로부터 한강방위선이 무너져 공산군이 수원을 향해 물밀 듯 내려오고 있다는 보고를 받았다. 미24사단의 선발대인「스미드」기동부대

    중앙일보

    1972.03.28 00:00

  • (418)(45)황규면

    대통령을 모시고 간 사람은 이철원 공보처장, 나, 김장흥 총경과 경호원, 그리고 임시관저에 있던 김옥자씨 뿐이다. 여관에 따로 들었던 고재봉·김광섭 비서에게는 급하게 서두르는 통에

    중앙일보

    1972.03.27 00:00

  • (417) | 경무대 사계 (44)|황규면

    전선이 한강 방위선에서 며칠간 고정되자 그런대로 정부의 기능은 발휘되기 시작했다. 모든 행정 연락은 이영진 충남지사가 맡아 했고 신성모 국방장관은 수원에서 국군을 독려했다. 정부

    중앙일보

    1972.03.25 00:00

  • (416) | 경무대 사계 (43)|황규면

    임시 관저로 마련된 충남지사 관저에 들어가서야 우리는 식사를 들었다. 그리고 보니 아침·점심을 꼬박 굶은 채였다. 조금후 막 대전에 온 「무초」 미 대사가 대통령을 찾아왔다. 「

    중앙일보

    1972.03.24 00:00

  • (415) | 경무대 사계 (42)|황규만

    나와 이 박사의 인연은 45년 말 그분의 돈암장 시절부터다. 해방 후 영어를 좀 한다고 해서 미군정청에 번역관으로 근무하다가 돈암장에 영문 비서로 들어갔다. 처음에는 비서가 많았

    중앙일보

    1972.03.23 00:00

  • (414) | 경무대 4계 (41)|고재봉

    27일 새벽 2시가 넘어 경무대에 온 신 국방장관은 사태가 심각하다고 보고했다. 곧이어 유석 (조병옥)과 서울시장 만송 (이기붕)이 들어와 비서들에게 아무래도 피난해야겠다고 서둘

    중앙일보

    1972.03.22 00:00

  • (413) | 경무대 사계 (40)|고재봉

    6월25일은 일요일이라 집에서 쉬고 있었다. 그런데 아침 10시쯤 지나 대통령 경호 책임자인 김장흥 총경으로부터 전화가 왔다. 『이북 놈들이 장난을 하는 모양입니다.』 『또 좀

    중앙일보

    1972.03.21 00:00

  • (412) | 경무대 사계 (39)|고재봉

    1950년으로 접어들어 북괴는 무력 남침 준비를 착착 진행, 한반도의 풍운은 급박해갔다. 그러나 미국이나 우리 정부의 정보는 어두웠다. 가끔 우리 육군 첩보 부대로부터 북괴가 「

    중앙일보

    1972.03.20 00:00

  • 남기고 싶은 이야기들(411)|경무대 사계(38)|고재봉

    이 대통령은 일단 잘못된 것을 알기만 하면 즉각 고치는 성품이다. 후에 적폐로 원성을 듣게되지만 그것은 자신이 인의장막에 가려 몰랐기 때문이지 알기만 하면 그대로 두지 못하는 성미

    중앙일보

    1972.03.18 00:00

  • (410)|경무대 사계(37)|고재봉

    이 박사는 공정을 행정의 기본으로 했다. 후일 다시 얘기할 기회가 있겠지만 특히 인사행정엔 무던히 신중을 기하고 보다 적임자를 찾으려고 애썼다. 그런데 어쩐 셈인지 정부고위관계자의

    중앙일보

    1972.03.17 00:00

  • (409) 경무대 사계(36)|고재봉

    해가 바뀌어 50년으로 접어들면서 민국당이 이 대통령을 견제하기 위해 내각책임제 개헌안을 내놓아 정국은 술렁댔다. 정부수립까지 민국당은 이 박사에 가장 협조적인 정치세력의 하나였

    중앙일보

    1972.03.16 00:00

  • (408)경무대 사계(35)|고재봉

    「원맨쉽」이 강했던 이 박사는 또 그만큼 신념이 뚜렷한 분이다. 그의 신념은 신앙의 토대 위에 선 것이었다. 이 박사는 매일 아침 6시 반에 일어나면 언제나 성경 귀절을 하나씩 꼭

    중앙일보

    1972.03.15 00:00

  • (407)경무대사계|고재봉

    5월4일 새벽3시 소위 개성지구 38선 경비 인민군 대대 2천여명이 중화기로 개성시를 향해 남침을 자행했다. 이날 4시반쯤 개성시내 신관지서후방에서 전투가 벌어져 155고지와 1

    중앙일보

    1972.03.14 00:00

  • (하)예보 어려운 그 방향 미·중공 기류|스튜어트·헨슬리(UPI) 특별기고

    소련 역시 이모든 움직임에 대해 비상히 경제적이다. 소련은 그렇지 않다는 거듭된 공식확언을 받고서도 북경무대 이면에서는 모종의 반소음모가 추구되었다고 믿고있다. 이와 같은 소련의

    중앙일보

    1972.03.14 00:00

  • (406)경무대사계|고재봉

    이대통령은 아들도 없는데다 가까운 친척마저 없어 외롭게 지냈다. 내가 경무대에 들어간지 20일만에 이 박사는 대통령이 된지 처음으로 생신을 맞았다. 그러나 생신 상을 올릴 마땅한

    중앙일보

    1972.03.13 00:00

  • (405)경무대사계(32)|고재봉

    감찰위는 장관들에 대해서도 잘못이 있으면 가차없이 조사하여 검찰에 제소했다. 내가 경무대에 들어가기 보름전인 2월23일 조봉암 농림장관이 경질되고 이종현씨가 임명됐다. 49년 1월

    중앙일보

    1972.03.11 00:00

  • (404)경무대사계(31)|고재봉

    앞에서 말한 것처럼 대통령비서실 직원은 이 박사 말대로 완전히 「사비서」였기 때문에 4·19가 날 때까지 발령장 없이 일을 했다. 정부의 부처에서 일하던 사람이 비서실로 들어올

    중앙일보

    1972.03.10 00:00

  • (403)경무대사계(30)|고재봉

    내가 이승만 전대통령과 인연을 맺은 것은 49년1월 초였다. 하루는 경찰에서 내 집에 와서 나에 관한 신상조사를 하고 갔다. 며칠인가 지난 후 1월6일쯤으로 기억되는데 엽서가 한

    중앙일보

    1972.03.09 00:0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