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뷰] 소름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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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한국영화들을 보면 흥행성이 뛰어난 작품이 많다. 몇 년 사이 국내시장에서 거두고 있는 관객동원 수치에서도 한국영화는 눈부신 성장을 하고있는게 사실. 반가운 일이다. 그런데 평자의 입장에선 불편한 경우가 전혀 없는게 아니다. 개별적인 작품으로 보면 별다르게 무리없는 영화들이 다수 제작되고 있지만 막상 연말이 되면 괴로운 일이 생긴다.

연말 결산을 목적으로 '괜찮은' 한국영화들을 추리다보면 리스트를 작성하기 만만치 않기 때문이다. 적은 제작편수가 문제가 아니라 눈에 띄는 작품을 고르기가 쉽지 않은 거다. '소름'은 같은 이유로 소중하게 다가오는 영화라고 할수 있다. 게다가 감독의 장편데뷔작이라는 점에서 볼 때 이 영화를 주목할 이유는 더욱 분명해진다. '소름'은 올해 부천영화제 폐막작이기도 하다.

'소름'을 굳이 분류하자면 심리 스릴러라고 해야겠다. 같은 공간에서 일상을 영위하는 인물들이 서로 얽히고, 서로를 배신하기도 한다. 남편에게 학대당하는 여성이 있고, 이 여성을 은근히 사랑하는 남자가 있다. 택시기사인 용현은 미금아파트 504호에 이사온다. 집안의 천장은 불에 그을린 흔적이 남아있고 복도에선 이상한 신음소리가 들린다. 용현은 선영과 마주치는데 그녀는 같은 아파트 주민이기도 하다. 선영은 하나뿐인 아이가 실종된 상태이며 남편의 잦은 폭력에 시달리고 있는 상태. 어느날 선영은 자신과 싸우던 남편이 갑자기 숨졌다면서 용현에게 도움을 청한다. 시체를 암매장하자는 것.

'소름'은 약간은 눈에 익은 스릴러의 외양을 띄고 있으며 게다가 원혼의 저주라는 모티브를 슬쩍 가미하면서 공포물의 문법을 구비하고 있기도 하다. 과거 아파트에서 벌어졌던 끔찍한 사건이 아파트 주민들의 기억에서 되살아나고, 용현의 어두운 과거가 베일을 벗으면서 인물들 관계는 좀더 복잡하게 얽힌다.

'소름'은 잘 짜인 장르영화로 보기에 별무리가 없다. 아쉬운 점이라면 스릴러 영화로서 상투적인 구석이 있지 않나 하는 점. 아마도 같은 장르를 즐기는 관객이라면 영화 결말을 짐작하기 어렵지 않을 것 같다. 그런데 '소름'의 진정한 미덕은 다른 곳에서 나온다. 이 영화는 아파트라는 밀폐된 곳에 갇혀있는 인물들, 그리고 추레한 공간의 사실감을 숨막히는 분위기로 되살려놓는다.

지은지 30년된 아파트는 겉보기에도 으스스하고 금새 무너져내릴듯한 위기감을 조성한다. 아파트 주민들은 과거에 있었던 살인사건에 얽힌 미스테리를 마치 전설처럼 타인에게 전하고, 누군가는 이를 모티브로 대중소설을 써내려간다. 남편을 암매장한 여인은 작업을 도운 남자와 잠자리를 함께 한다. 이렇듯 '소름'은 컬트적인 기운을 내뿜으면서 암흑의 공간 속에서 길을 잃은 인물들의 광기를 끄집어낸다. 그 솜씨가 무척 예리하고 동시에 냉정하기 이를데 없다.

'소름'은 퇴적된 시간에 관한 영화로도 읽을 수 있다. 차곡차곡 쌓인 시간의 의미를 되짚어가는 작품이라고 할까. 영화에 등장하는 인물은 하나같이 음습한 과거를 지니고 있다. 살인과 폭력, 그리고 인간성의 상실 등 비슷한 질병을 앓은 적 있는 것이다. 그들의 현재 역시 별반 다르지 않다. 영화는 이들의 과거를 마치 옷을 벗기듯 하나씩 들춰내면서 퇴적된 시간에서 풍겨나오는 기묘한 악취를 그대로 전한다. 같은 시각에서 '소름'은 잘 짜인 스릴러 영화인 동시에 매우 비관적인 영화적 메시지를 담은, 온전한 감독의 영화이기도 하다. 촬영과 조명, 사운드, 연기 등의 면에서도 제작진 노력이 곳곳에 배어있는 흔적을 발견할 수 있다.

영화를 만든 이는 단편영화 '메멘토'와 '풍경' 등로 이미 국내영화계의 주목을 받은 바 있는 윤종찬 감독. 개인적으로 영화 '소름'은 다소 거칠고 산만한 구석이 있는 영화지만 흔히 한국 공포스릴러 영화의 개척자라 불리는 1960년대 김기영 감독 영화의 맥을 잇고 있는 작품이라는 감흥이 들었다. 이 정도로 인간의 본능을 지독하게, 그리고 논리적으로 파고드는 영화를 본건 정말 오랜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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