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사설

소신도 원칙도 없는 식약청 어떻게 믿나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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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8면

식품·의약품 분야에서 국민 안전을 지키고 정확한 정보를 제공해야 할 식품의약품안전청이 우왕좌왕 행정으로 소비자 혼란과 불안을 증폭시키고 있다.

 식약청은 발암물질 벤조피렌의 함유량이 기준치를 초과한 원료(가다랑어포)를 사용한 4개 업체 9개 품목의 라면·조미료 등에 대해 25일 자진 회수 결정을 내렸다. 애초 해당 원료를 쓴 라면 수프 등에서 나온 벤조피렌 양이 인체에 해롭지 않은 수준이어서 유통에 문제가 없다는 입장을 뒤집은 것이다. 별도의 설득력 있는 해명도 없다. 이 같은 무소신 행정이 외려 불신을 자초하고 있다.

 식약청의 오락가락 행정은 앞서 24일 열린 국회 보건복지위 국정감사에서도 나타났다. 이희성 식약청장은 야당 의원들의 질의가 이어지자 이날 오후 “추가 조사를 거쳐 부적합 원료를 쓴 라면을 회수토록 하겠다”고 답변했다. 이날 오전까지도 최종 제품인 라면 수프에 든 벤조피렌 양은 인체에 무해하다며 ‘회수 불가’ 입장을 펴다가 의원들이 거듭 요구하자 결국 반나절 만에 입장을 바꿨다. 이처럼 원칙 없는 행동은 국민의 눈에 과학적 근거와 법적 기준이 정치적 압력과 행정 편의에 의해 왔다갔다하는 것으로밖에 보이지 않는다.

 식품·의약품 안전을 책임지는 식약청이 이처럼 아침, 저녁으로 하는 말이 다르다면 국민은 무엇을 믿어야 한단 말인가. 심지어 회수를 발표하면서 “최종 제품의 벤조피렌 검출량이 인체에 해로운 수준이 아니어서 자진 회수 형식으로 결정했다”는 설명까지 했다. 그렇다면 법적 근거나 과학적 근거도 없이 기업에 제품의 자진 회수를 요구했다는 이야기가 아닌가. 이런 식으로 눈치 행정을 펴는 바람에 국민의 불안과 불신은 눈덩이처럼 커지고 있다. 한국 가공식품의 주요 수출시장인 대만에서도 회수 결정이 내려지는 등 해외 시장에까지 악영향을 미치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 식약청이 믿음을 주는 기관으로 거듭나려면 과학적 근거와 법적 기준을 바탕으로 국민 안전과 건강을 위한 원칙과 소신의 행정을 펴야 한다. 관련 기업들도 신속한 조치와 정보 제공, 그리고 철저한 안전관리로 소비자 신뢰를 회복하는 노력을 해야 마땅하다. 식약청과 기업 모두 최근 식품 안전에 대한 국민 관심의 증대에 걸맞은 책임감을 느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