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퇴상품을 ‘100세 시대’로 내놨더니 돈 몰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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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 04면

2003년 일이다. 최홍 랜드마크 자산운용(현 ING자산운용) 대표는 깊은 고민에 빠졌다. 적립식 펀드 출시를 앞두고 이름 짓기가 쉽지 않아서였다. 당시로선 신개념의 상품이라 투자자들이 쉽게 이해할 수 있는 이름이 필요했다. 그때 회사 내 아이디어맨으로 소문난 이종우 상무(현재 한화증권 상무)가 묘수를 냈다. “‘1억 만들기’가 어떨까요.” 최 대표를 비롯한 관계자 모두 무릎을 쳤다. 참신한 데다 “나도 한번 해봐야겠다”는 목표 의식을 주는 이름이었기 때문이다. 국내 적립식펀드 열풍의 불씨를 지핀 ‘1억 만들기’펀드는 이렇게 나왔다.

 다음해 미래에셋자산운용은 비슷한 이름의 ‘3억 만들기’ 펀드를 내놓았다. 역시 큰 성공을 거뒀다. ‘1억 만들기’와 ‘3억 만들기’가 앞서거니 뒤서거니 수익률 경쟁을 벌이며 시중자금을 끌어모았다. 그 덕분에 적립식 펀드가 순탄하게 자리를 잡을 수 있었다. 최 대표는 “적립식펀드의 성공에 이름이 적어도 10% 정도의 역할은 했다고 본다”고 말했다. 이후 ‘○억 만들기’라는 식의 금융상품이 쏟아졌다. 금융감독 당국은 2005년 ‘○억’ 식으로 수치가 들어간 펀드 이름을 금지했다. 과열이 우려돼서다.

 올 들어 부쩍 인기를 끌고 있는 은퇴상품도 마찬가지다. 우리투자증권은 올 상반기 ‘100세 시대’라는 이름으로 은퇴상품을 팔기 시작했다. 우리투자증권 관계자는 “올 들어 ‘100세 시대’란 이름 등장과 함께 은퇴상품에 대한 관심이 한 단계 높아졌다”며 “100세 시대 라이프사이클 펀드 등 관련 상품 잔액이 1년도 안 돼 2조730억원 넘어선 것은 네이밍 효과 컸다”고 말했다. 그는 “은퇴란 단어엔 부정적인 뉘앙스가 있어 사람들이 외면하기 쉽다”며 “하지만 100세라는 단어는 미래를 구체적으로 그려보게 만들고 미리 준비해야겠다는 생각을 심어줘 고객들에게 쉽게 다가갈 수 있었다”고 말했다.

 좋은 작명은 어떤 것일까. 정태영 현대카드 사장은 “금융상품은 과자나 라면이 아니다”며 “그저 튀는 이름으로 호객행위를 해선 오래갈 수 없다”고 말했다. 그는 2003년 현대카드 M을 시작으로 알파벳과 숫자가 결합한 카드 네이밍으로 카드시장 점유율을 끌어올렸다. 이후 2005년 국내 첫 VVIP카드인 블랙카드, 그리고 2011년 혜택에 필요한 각종 조건을 없앤 제로카드 등 잇따른 히트작을 내놓았다. 정 사장은 “현대카드는 M카드부터 쭉 직관성·확장성·차별성에 원칙을 둔 작명을 해왔다”며 “금융상품 네이밍에는 회사 외부의 전문 카피라이터가 필요 없다”고 말했다. 한 카드업계 관계자는 “현대카드 상품들은 이름만 봐도 어떤 상품인지 대충 예측 가능하다는 게 장점”이라고 평가했다.

 좋은 이름은 시대 흐름을 탄다. KB금융지주 경영연구소는 올 초 내놓은 ‘2011년 금융 히트상품을 통해 본 고객 트렌드’에서 “사회적 분위기에 따라 히트상품이 달라진다”고 지적했다. 요즘 같은 시기엔 익숙함, 다시 말해 어렵지 않고 쉬운 이름을 선호한다는 것이다. 은행예금으로는 KB국민은행의 ‘첫재테크적금’이나 신한은행의 ‘생활의 지혜 적금’이 좋은 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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