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우와 호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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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84호 30면

“장우가 서울에 입성했단다.”
친구 윤열에게서 온 문자 메시지의 첫 문장이다. 우리는 서둘러 날짜를 맞추고 점령군 맞을 채비를 했다. 윤열과 호, 그리고 나는 강남역 11번 출구 앞에서 먼저 만나 가까운 막걸리집으로 자리를 잡았다. 우리는 서로의 안부를 묻지도 않고 장우의 근황에 대해 이야기했다. 장우는 부산에서 보험회사에 다녔다. 노조 일을 했고 밀양의 지점으로 발령받아 가족과 함께 그곳으로 이사해서 지냈다. 그러다 이번에 서울 본사로 온 것이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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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막걸리와 해물파전을 주문했다. 장우는 갑자기 전무님 면담이 생겨 좀 늦는다고 했다. 우리는 모두 고등학교 1학년 때 같은 반이었다. 장우는 우리 중에서도 호와 더 친했다. 그냥 친했다고 말하기엔 부족하다. 막역했다. 이른바 ‘절친’이었다. 사는 동네도 같았다. 2학년으로 올라가면서 문과, 이과로 갈라지긴 했으나 둘은 여전히 붙어다녔다. 정말 꼭 붙어다니진 않았겠지만 그런 인상이었다. 어느 자리에서나 장우 옆엔 호가, 호 옆엔 장우가 있었던 것만 같다. 그러고 보면 둘은 대학도 같은 대학을 다녔다. 단과대는 서로 달랐지만.

약속시간이 한 시간 넘도록 오지 않던 장우는 우리가 막걸리 두 주전자를 비울 때쯤 나타났다. 호의 얼굴이 환해졌다. 나는 호와 장우의 얼굴을 번갈아 보면서 둘의 사귐 역시 ‘관포지교’나 ‘백아절현’ 같은 아름다운 우정이 아닐까 생각했다. 둘은 서로 달랐다. 성품도, 외모도, 말과 행동도, 술버릇도 거의 정반대였다. 활달하고 거침없고 변화무쌍한 쪽이 장우라면 반듯하고 모범적이고 변함없는 쪽이 호였다. 장우는 앉자마자 좌중을 사로잡았다. 장우는 말을 재미있고 맛깔나게 하는 재주를 가졌다. 아는 이야기도 장우가 하면 새로워지고 지루한 내용도 장우가 꺼내면 흥미진진해진다. 술집에서 장우가 이야기를 시작하면 어느새 다른 자리의 사람들까지 대화를 멈추고 귀 기울여 이야기를 들을 정도다.

장우는 이야기를 하고 우리는 듣는다. 20년도 더 전에 그때도 한 번 장우가 서울에 온 적이 있었다. 그날 호는 회사 마치고 저녁에 검도 도장에서 운동하느라 빠지고 윤열이와 나, 그리고 몇몇 친구가 장우와 어울렸다. 장우는 취했고 중간에 몇 번이나 호를 찾았다. 장우에게 호는 집 같은 친구다. 결국 윤열이와 내가 취한 장우를 택시에 태워 호의 자취방에 데려다 주기로 했다. 호가 일러준 곳에서 내리자 택시비를 들고 호가 기다리고 있었다. 마치 검도 선수가 인사하듯이 정중하게 기사분에게 인사를 한 후에 호는 땅바닥에 주저앉은 장우를 업었다. 그렇게 장우를 업는 호의 행동이 어찌나 자연스럽고 멋진지, 호에게 업힌 장우는 어찌나 온순한지 나는 호의 자취방이 있는 옥탑방까지 오르는 내내 흐뭇하게 바라보았다.

오늘도 장우는 취했다. 안주도 잘 먹지 않고 막걸리만 마셨기 때문이다. 밖으로 나온 장우는 휘청휘청 걷는다. 호가 장우에게 물었다. “장우야, 업어줄까?” “미쳤나?” 장우는 그렇게 말하면서도 얼른 호의 넓은 등에 업힌다. 장우가 말했다. “호야, 네가 날 업었다고 생각하면 큰 오산이다. 내가 널 백허그하고 있는 거다. 알기는 그리 알아라.”
장우의 엉터리 주장에 호가 “그래, 그래” 하면서 웃는다. 사람이 살아야 비로소 집이다. 장우는 호라는 집에 사는 사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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