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정 중시’ 시크교도의 수난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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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83호 33면

미국 위스콘신주의 한적한 마을 오크크리크의 시크교 사원에서 5일(현지시간) 미군 출신의 백인우월주의자 웨이드 마이클 페이지(40)가 마구 총을 쏴 6명의 목숨을 빼앗았다. 이 사건은 다른 인종, 다른 종교를 믿는 사람이라면 이유 없이 증오하는 백인우월주의자가 모든 인간은 평등하며 함께 공존해야 한다고 믿는 시크교도를 학살한 만행으로 역사에 기록될 것이다. 시크교는 평화와 평등을 유난히 강조하는 종교이기 때문이다.

채인택의 미시 세계사

인간은 신에 대한 사랑과 타인에 대한 선행으로만 구제될 수 있다는 게 시크교도의 믿음이다. 이들은 다른 종교에 대해 관용과 공존을 유난히 강조한다. 물론 인도에선 성지를 놓고 힌두교도들과 혈투를 벌이기도 했지만 믿음이 다르다고 다른 종교인을 무시하거나 증오하진 않는다. 게다가 채식주의자가 대부분이고 가정을 삶과 종교의 중심에 놓을 정도로 중시한다.

힌두교 세상인 인도에서 힌두교의 가장 두드러진 특징의 하나인 카스트 제도를 비판하며 탄생한 용기 있는 개혁 종교다. 현재 파키스탄인 펀자브 지방 라호르 근교에서 태어난 구루 나나크(1469~1539)가 창시했다. 그는 인간은 누구나 계급·종족·출신에 관계없이 신에게 평등하게 접근할 수 있다고 가르쳤다.

종교 의식과 교단, 경전이 이토록 담백한 종교도 드물 것이다. 묵상을 제외한 모든 종교의식을 배제한다. 교단은 구루(스승)와 시크(제자)로만 이뤄진다. 구루교가 아닌 시크교라 불리는 것 자체가 이 종교의 평등 성격을 잘 드러낸다. 경전도 역대 구루들의 언행을 모은 그란트라는 책만 있다.

나나크는 당시 인도에서 세력을 떨치던 이슬람의 일신교와 평등주의에서 영향을 받긴 했다. 하지만 이슬람을 참조해 힌두교의 개혁을 부르짖다 새로운 종교를 창시했을 뿐 이슬람과는 근본적으로 다르다. 오히려 이슬람 국가인 무굴제국의 탄압을 받았다. 인과응보와 윤회사상을 따르면서 우상숭배와 고행·미신에 반대한다는 점에서 불교에 가깝다.

시크교도는 전 세계 3000만 명이 있다. 인도에 1900만 명, 영국에 760만 명, 미국에 50만 명이 각각 산다. 한국과 가까운 동남아에도 제법 있다. 영국 식민지였던 말레이시아에 10만 명, 싱가포르에 1만 명, 홍콩에 8000명쯤 각각 거주한다. 세계 어디에 살든 종교·종족이 다른 현지인들과 잘 어울려 지내 왔다.

시크교도는 종교적 정체성을 아예 드러내 놓고 산다. 특히 남자는 금세 알아볼 수 있다. 머리와 수염을 깎지 않고 항상 터번을 쓰기 때문이다. 인도 상징의 하나인 터번이 사실은 종교적 소수파인 시크교도의 상징이었던 것이다. 게다가 이름 다음에 남자들은 싱(수사자), 여자들은 카우르(암사자)라는 단어를 넣는다. 이름만 들어도 시크교도임을 파악할 수 있다. 항상 터번 차림에 수염을 기르는 인도 총리 만모한 싱을 보라. 외모와 이름 모두에서 자신의 종교를 드러내 놓고 강하게 드러낸다. 이를 통해 공동체의 정체성을 유지한다. 이런 시크교도들에게 증오 범죄를 저지른 백인우월주의자는 과연 누가 우월함을 보여주는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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