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림자로 만든 환상의 애니메이션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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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6년 타계한 폴란드의 거장 크쥐슈토프 키에슬로프스키는 그의 역작 '사랑에 관한 짧은 필름' 에서 사랑은 타인과의 '관계' 속에서 이뤄진다는 평범한 비밀을 우리에게 일러준다.

28일 개봉하는 프랑스 애니메이션 '프린스 앤 프린세스' 도 영원한 사랑이 거짓말이라는 것을 알면서도 여전히 '관계맺기' 를 갈망하는 세상의 남녀들에게 사랑의 지난(至難)한 여정을 통과하는 열쇠를 선물한다.

이 작품은 지난해 부산국제영화제 와이드 앵글 부문에 초청돼 관객들에게 높은 점수를 받았다.

'키리쿠와 마녀' 로 제24회 안시 국제애니메이션페스티벌 대상을 수상한 미셸 오슬로가 감독을, '소녀와 첼리스트' 로 65년 대상을 받은 프랑스를 대표하는 애니메이터 장 프랑수아 라기오니가 제작을 맡았다. 두 사람의 이름만으로도 이미 설레일 매니어들이 많을 듯 싶다.

'사랑에...' 이 '엿보기' 라는 방법을 썼다면 '프린스…' 는 '영화 상영과 관람' 을 통해 극을 전개한다.

영화 속 주인공이 되고 싶은 소년과 소녀가 무대 앞에 머리를 맞대고 시대와 인물을 구상하고 있으면, 고대 이집트에서 중세 유럽을 거쳐 일본, 심지어는 우주까지 종횡무진 넘나드는 재미난 여섯 편의 이야기가 경쾌한 템포로 펼쳐진다.

에피소드마다 용기.인내.헌신.고독 등 사랑의 본질에 대한 짤막한 메시지를 담고 있다.

개미로 변할까봐 두렵지만 공주를 마법에서 풀기 위해 있는 힘을 다하는 왕자( '공주와 다이아몬드 목걸이' ),

자기의 전재산이나 다름 없는 무화과를 이기적인 여왕에게 끊임없이 바치는 소년( '무화과 소년' ),

굳게 닫힌 마녀의 성문을 끈기있게 참고 기다린 끝에 열고야 마는 청년( '마녀의 성' ),

자신에게 접근하는 남자를 모조리 죽이는 잔인한 여왕의 내면에 감춰진 고독을 치유하는 조련사( '잔인한 여왕과 조련사' ),

영원한 사랑을 맹세하지만 서로의 모습이 변하자 다툼을 일삼는 왕자와 공주( '왕자와 공주' )등이다.

'사랑에...' 에서 여태껏 '보여지던' 대상이 종국에는 '마주 보는' 대상으로 변화한 것처럼, '프린스…' 도 소년과 소녀가 역할극을 통해 조금씩 관계의 의미를 깨닫고 동시에 그것을 지켜보는 관객들도 자연스럽게 그 깨달음에 동참하도록 하고 있다.

이 작품은 실루엣 애니메이션이라는 기법으로 만들어져 더욱 흥미를 끈다. 물체의 그림자를 이용하는 실루엣 애니메이션은 빛과 그림자가 빚어내는 선의 아름다움을 선사한다.

여기에 색채가 들어간 배경이 덧붙여지면 검은색이 더욱 깊고 풍성하게 보이게 한다. 물론 올 컬러 작품보다는 시간이 지날수록 집중도가 떨어지는 단점은 있다.

셀 애니메이션 위주인 디즈니와 저패니메이션에 익숙한 관객들에게 97년 클레이메이션(점토 애니메이션) '월레스와 그로밋' 이 색다른 시각적 즐거움을 선사한 바 있다. '프린스…' 역시 애니메이션의 드넓은 세계에 대한 인식의 지평을 넓혀주는 작품이다.

실루엣 애니메이션은…

실루엣(그림자)애니메이션은 두꺼운 종이로 인물과 배경을 만든 뒤 뒷편에서 조명을 비춰 생긴 그림자를 한 프레임씩 촬영하는, 손이 많이 가는 기법이다.

어렸을 적 전등 앞에서 두 손으로 갖가지 동물 모양을 벽에 그림자로 만들던 것을 떠올리면 원리가 쉽게 이해된다. 그림자와 조명만으로 이미지를 만들어내기 때문에 자칫하면 단조롭게 느껴질 수도 있다.

인물은 팔.다리.목 등 관절 부위를 철사로 이어 움직일 수 있게 한다. 보다 유연하고 섬세한 동작을 연출하기 위해 20~50개의 조각으로 잘게 나누는 것이 보통이다.

실루엣 애니메이션의 창시자는 1920년대에 활동했던 독일의 여성 감독 로테 라이니거다. 라이니거는 유럽 최초의 장편 실루엣 애니메이션인 '아흐메드 왕자의 모험' (26년)을 발표, 흑백의 실루엣만으로 환상적인 동화와 신화의 세계를 선사했다.

'잠자는 숲속의 공주' '헨젤과 그레텔' 등 그림 형제의 동화를 단골 소재로 삼았던 그녀는 76년 오타와 국제애니메이션페스티벌에서 그간의 업적을 인정받아 공로상을 수상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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