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50년 보스턴 마라톤 우승 함기용이 말하는 1948년 올림픽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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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기용씨(左), 최윤칠씨(右)

1948년 런던올림픽은 대한민국이 처음으로 출전한 올림픽이다. 대한올림픽위원회(KOC)는 최근 초대 선수단 가운데 생존자인 최윤칠(84·마라톤)씨를 2012년 런던올림픽 참관단으로 초청했다. 당시 선수단 대다수는 세상을 떠났다. 함기용(82) 전 대한육상경기연맹 부회장은 마라톤 대표 후보로 뽑혀 1948년 런던 땅을 밟은 인물이다. 1950년 보스턴 마라톤 우승자인 그로부터 64년 전의 이야기를 들었다.

1950년 보스턴 마라톤에서 1위로 결승 테이프를 끊는 함기용 선수. 함 선수는 1948년 런던올림픽에 갔지만 경기에 뛰지는 못했다. [사진 대한육상경기연맹]

 1948년 런던올림픽에서 한국 마라톤은 참패했어. 금메달 후보였던 최윤칠 선배가 38㎞ 지점에서 기권했고, 홍종오 선배가 25위, 서윤복 선배가 27위였지. 한 국가에서 출전할 수 있는 선수는 세 명인데 나도 런던에 갔어. 현지 선발전에서 출전자 세 명을 가릴 계획이었지. 어려운 시절에 네 명을 보냈다는 건 그만큼 마라톤에 거는 기대가 컸다는 이야기야.

 난 현지 선발전에서 2등을 했지만 어쩐 일인지 최종 명단엔 들지 못했어. 대회 당일엔 선배들을 응원하러 코스 도로변에 나가 있었지. 35㎞ 좀 넘은 지점이었을 거야. 최 선배가 선두였어. 하지만 한눈에 ‘안 되겠다’ 싶더군. 발이 앞으로 나가질 못하더라고. 페이스 조절에 실패한 거지.

 사실 올림픽 부진에는 이유가 있었어. 서울에서 런던까지 17박18일 일정이었는데 남승룡 코치가 배 갑판 위에서도, 중간 기착한 비행장에서도 끊임없이 훈련을 시켰지. 그러니 정작 런던에선 체력이 바닥난 거야.

 한국에선 난리가 났어. 국민들이 올림픽 후원권을 사서 대표팀 경비를 마련해 준 대회였잖아. 귀국하니 사람들이 후원권을 집어던지며 “돈 물어내라”고 하더군. 그래서 한동안 도로에서 훈련을 못하고 삼청동 숙소 뒷산을 몰래 뛰어야 했지.

 운동선수로 가장 빛났던 때는 1950년 보스턴 마라톤이야. 내가 1등(2시간32분39초), 송길윤 선배가 2등, 최 선배가 3등으로 들어왔지. 세계 마라톤에서 1~3등을 한 국가에서 차지한 건 그때가 처음이야.

 6월 3일 귀국했는데, 곧 한국전쟁이 터졌어. 보스턴 대회 금메달을 동대문운동장 근처에 묻어두고 피란을 떠났지. 나중에 돌아와 보니 누가 파갔더군. 하지만 잃어버린 금메달이 내 목숨을 구한 셈이야. 춘천에서 날 인민군 장교로 오인한 국군에게 끌려가 총살 직전까지 갔어. 죽기 전에 말이라도 남겨야겠다 싶어 “내가 보스턴에서 우승한 함기용이오”라고 했어. 천운인지 군인 한 명이 날 알아보고 풀어주더군.

 올림픽과는 끝내 인연이 없었어. 헬싱키 올림픽이 열린 1952년에 난 고려대 2학년이었어. 3월 대표 선발전을 앞두고 오른쪽 발꿈치에 통증이 생겼어. 대구의 병원에서 주사를 맞았는데 그만 주사바늘이 신경을 건드린 거야. 꼬박 3개월을 병원에 누워 있었지. 내 선수 생명도 그걸로 끝났어.

 1952년 올림픽에 나갔더라도 금메달은 못 땄을 거야. 이 대회 우승자는 체코슬로바키아의 ‘인간 기관차’ 에밀 자토펙이야. 마라톤뿐 아니라 5000m와 1만m도 휩쓸었지. 자토펙은 런던 대회에서도 1만m 우승을 차지했어. 그때 훈련을 같이 했는데 죽을 것처럼 팔을 냅다 휘두르면서 질주하는 모습이 아직도 선명해.

 1992년 바르셀로나 올림픽에서 황영조가 금메달을 땄을 때는 감격스러웠어.

 지금 한국 육상은 침체기야. 체격이나 체력조건이 문제가 아니라고 생각해. 세계 최고가 되고 싶다는 목표를 세우고, 세계에서 가장 많은 훈련량을 견뎌야 해. 감히 말하건대 마라톤은 정신과 육체의 고난을 스스로에게 지운 뒤 극복하는 운동이야. 그 점에서 난 행복했지. 손기정, 서윤복이라는 세계 최고의 선배들이 있었으니까. 그래서 스포츠에는 역사가 중요한 거야.

정리=최민규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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