깊이 절망하는 인간이 희망을 잡는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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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5면

타력(他力)
이츠키 히로유키 지음
채숙향 옮김, 지식여행
310쪽, 1만3900원

불교용어 타력(他力)은 친숙한 말은 아니다. 기독교에서 말하는 하늘의 은총과도 비슷하다는 점에 착안해 저자는 ‘삶을 떠받치는, 나 이외의 무언가 커다란 힘’이라고 친절하게 설명한다. 그걸 앞세운 산문집 『타력』은 지친 삶을 만져주는 힐링(치료)이 컨셉트다. 저자 이츠키 히로유키(80)는 일본의 원로작가다.

 그가 설명하는 타력이란 ‘내 주위를 바람처럼 흐르는 커다란 에너지’인데, 그걸 느끼는 것이 우선 중요하다. 자신감을 내세우고, 긍정의 힘을 과신하는 것은 현대인의 얕은 생각이거나, 지적(知的) 오만일 수 있다는 메시지다. 인상적인 게 셰익스피어의 희곡 『리어왕』에 나오는 짧은 대사 ‘사람은 모두 울면서 태어난다’이다.

 저자가 즐겨 쓰는 이 말은 삶의 진리를 함축한다. 태어나는 방식부터 ‘나의 선택’이란 없으며, 개인 의지를 넘어서는 어떤 힘을 전제로 한다. 그렇다고 비관이나 운명론과는 다르다. 타력은 ‘깊이 절망하는 인간이 희망을 잡는다’는 역설의 대긍정을 전제로 한다.

 저자는 그걸 세상 짐을 잠시 내려놓을 줄 아는 ‘마이너스의 용기’라고 표현한다. 불교 정토종 신앙과 관련이 있다. 스스로의 힘(自力)으로 해탈하겠다는 의지만큼, 부처님 자비를 염송(念誦)하는 자세다. 그걸 체계화한 13세기 일본 고승 신란(1173~1262) 얘기가 책에 무게를 전해준다.

 이 책이 일본에 처음 나온 것은 12년 전. 직후 영역(英譯)돼 미국에서 2001년 ‘올해의 책’(스피리추얼 부문)에 올랐으니 보편적 호소력이 있다는 얘기다. 국내 입소문은 실은 삼성그룹 이건희 회장의 추천 때문이다. ‘자기를 버려야 삶이 풍요로워진다’라며 틈날 때마다 『타력』을 내 인생의 책에 꼽았다.

 실은 『타력』은 크게 낯설지 않은 메시지다. 염불선(禪)을 보급했던, 몇 해 전 입적한 청화 큰스님의 법문과도 꼭 닮았다. 선불교는 기본적으로 자력 신앙이지만, 한국인에게 염불의 힘이 여전하다. 그럼 타력신앙은 무책임-소극성과는 어찌 다를까. 둘의 차이는 나룻배 에피소드가 잘 설명해준다.

 “엔진이 없는 나룻배 위에서 아무리 애써봤자 헛수고입니다. 타력의 바람이 불지 않으면, 사실 우리의 일상도 생각대로 풀리지 않습니다. 그러나 바람이 불어왔을 때, 돛을 내리고 앉아서 졸고 있다면, 달릴 기회도 놓치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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