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서소문 포럼

도그마에 빠진 재정정책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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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2면

김영욱
논설위원

만일 유럽 위기가 우리 경제에 쓰나미처럼 밀려든다면, 또는 우리 경제가 앞으로 저(低)성장에 시달린다면 책임의 상당 부분은 이명박 대통령과 박재완 기획재정부 장관, 김중수 한국은행 총재가 져야 할 거다. 대통령은 프로를 써야 할 시기에 박 장관과 김 총재를 계속 중용하고 있는 잘못, 박 장관과 김 총재는 거시정책을 실종시킨 잘못이다. 거시정책은 재정, 금리, 환율 등 세 가지다. 재정과 환율을 책임진 박 장관은 균형예산 도그마에 빠져 재정정책을 실종시켰다. 급랭하는 경기를 조절하기 위한 선제적 조치를 등한시했고, 저성장을 당연시하며 ‘강한 경제’를 만드는 데 소홀했다. 금리를 맡은 김 총재는 금리 정책을 무용지물로 만든 잘못이다. 부하 직원더러 2류라고 한다지만, 내가 보기엔 그들이 2류다.

 한갓 기자가 뭘 아느냐고 할까 봐 최근에 쓴 칼럼을 요약한다. 나는 줄곧 재정정책이 제 기능을 찾아야 한다고 썼다. 거시정책이 실종됐고(본지 5월 11일자), 경기 급랭을 조절하기 위해 균형예산 도그마에서 벗어나야 함은 물론 가계부채 문제를 재정이 풀어야 하고(중앙SUNDAY 5월 20일자), 저성장에서 벗어나려면 내수·서비스업이 수출·제조업과 나란히 굴러가는 경제구조로 만들어야 한다(중앙SUNDAY 4월 29일자)고 했다.

 세 가지 이유에서였다. 우선 유럽 위기가 질기고 오래 갈 걸로 봤다. 유로존 붕괴까진 안 가겠지만, 그렇다 해도 유럽은 오랜 기간 경기침체에 허덕일 거다. 또 당면한 금융위기도 문제지만, 실물경제 위기가 더 큰 문제라고 봤다. 금융위기는 언제나 실물위기로 이어진다. 마지막으로 우리 경제가 저성장 고착 징후를 보였기 때문이다. 사상 초유의 2년 연속 3%대 성장이 그 증거다. 그렇다면 당면한 위기를 잘 넘기는 것도 중요하지만 성장동력을 확보하고 강한 경제로 만드는 것도 똑같이 중요하다. 그러려면 재정정책이 복원돼야 한다. 단기적으론 경기 급랭을 조절하고, 중장기적으론 산업 구조를 재편하고 성장 잠재력을 확충해야 하기 때문이다.

 지극히 당연한 얘기인데도 대통령과 박 장관은 균형재정만 노래 불렀다. 또 당면한 금융위기에만 집착했고, 저성장은 당연시했다. “한국은 외부요인 때문에 어렵다”는 말은 사실상 균형재정을 허물지 않겠다는 의미다. 우리 경제는 외풍에 대단히 취약한 구조다. 무역의존도가 110%고, 경제성장률이 세계경제의 그것과 정확히 맞물려 돌아간다. 외풍 때문에 내부가 흔들린다고 인식하는 한 이런 구조를 바꿀 필요를 느끼지 못한다. 경제가 흔들리는 게 내 탓이 아닌데 재정정책을 쓸 리 없다.

 “방화벽을 충분히 쌓았고 체질도 많이 개선됐다”며 “유럽 위기가 국내 외환·금융시장에 충격을 미치지 않을 것”이란 인식도 문제다. 위기 인식이 금융 차원에만 머무르고 있다는 증거다. 설령 그렇다고 해도 유사시 재정이 방화벽 역할을 해줄 수 있다는 생각은 하지 않는다. 가령 900조원이 넘는 가계부채, 여기에 100조원이 넘는 유사 가계부채인 자영업자 것까지 합치면 우리 가계부채는 무려 1000조원이 넘는다. 한국은행조차 “외생적 충격이 겹칠 경우 가계부채 문제가 경제위기로 이어질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는 분석을 내놓는 판국이다. 가계대출이 받을 충격을 줄이기 위해 재정이 나설 부분이 없는지 고민해야 하는 이유다. 자영업자 대출만이라도 정부가 도와줄 방법을 찾아야 한다. 외풍을 예상하고 영향을 덜 받게끔 선제적 조치를 펴는 것도, 외풍이 아무리 불어도 끄떡하지 않는 경제를 만드는 것도 재정이 해야 할 일이다.

 그런데도 정부는 균형재정 도그마에 빠져 재정정책을 실종시켰다. 앞으로도 그럴 참이라면 기획재정부가 존립할 이유가 없지 않을까. 그래도 못 믿겠다면 미 연방준비제도이사회(FRB) 의장인 버냉키가 지난 7일 의회 청문회에서 한 연설문을 읽어보시라. 균형재정을 역설하면서도 도그마에 빠지지 않았다. “경제 회복을 저해하지 않는 것”과 “강한 경제를 만드는 것”도 재정정책의 목적이라고 강조했다. 근로 의욕과 저축 유인을 부추기고 투자를 활성화하고 노동력의 질을 개선하는 것도 재정이 해야 할 일이라는 거다. 난세일수록 영웅이 필요한 법, 버냉키 같은 프로는 이 나라에 정녕 없는 걸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