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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설에 눈뜨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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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42면

정진홍
논설위원

# 800여㎞에 이르는 산티아고 가는 길을 걸으면 사계절을 느낀다. 처음 피레네를 넘을 때는 눈보라 몰아치는 혹독한 겨울이었다. 그후 팜플로나를 지날 때는 바스크인들의 아슴프레한 옛 추억을 담은 듯 가을 같았고, 고원지대인 메세타를 지날 때는 폭풍우가 몰아치다가 어느새 태양이 작열하는 여름 같았다. 그리고 칸타브리아산맥을 넘어 갈리시아 지방에 다다랐을 때는 변덕스럽긴 해도 어쩔 수 없는 봄 같았다. 마치 인생의 사계절을 걷는 것 같다. 다만 거꾸로!

 # 산티아고 가는 길을 40일 넘게 걸으며 눈이나 비 혹은 우박을 맞지 않은 날이 손으로 꼽힌다. 날이 멀쩡하게 화창하다가도 갑작스럽게 비가 쏟아지는 변덕스러움이 스페인의 날씨다. 아마도 기상예보가 가장 어려운 곳일지 모르겠다. 물론 “하루 종일 비가 오락가락하겠다”는 식으로 말하면 되려 딱 들어맞을지 모를 그런 곳이다. 이런 날씨에서 지내면서 한 가지 깨달은 역설이 있다. “폭우 속으로 들어가라”는 것이다. 흔히 폭우가 쏟아지면 더 나아가지 않는다. 비를 피하기 위해서다. 하지만 나는 거꾸로 폭우 속으로 들어갔다. 그러면 언제 그랬냐는 듯 비가 멈추고 하늘이 개인다. 반면에 비를 피해 머물면 그곳엔 더 시커먼 먹구름이 몰려들어 쏟아붓는다. 그 모습이 몇 ㎞를 지나서도 보일 만큼. 지금 내리는 비는 여기 머물며 피한다고 그치지 않는다. 오히려 앉아서 비 피하려다 더 많은 비를 만나고 만다. 아니 스스로 폭풍우의 한복판에 갇힐 수도 있다. 차라리 쏟아지는 빗속으로 들어가라! 그래야 맑은 하늘도 본다. 변화는 기다림이 아니라 행동이다.

 # 산티아고 가는 길을 걸으며 가장 아름다운 길 중 하나는 프로미스타로 향하는 카스티야 수로를 따라 길게 이어진 길이 아닐까 싶다. 그 길을 걸을 때 바람이 심했다. 새들이 아무리 날갯짓을 해도 앞으로 나아가지 못하고 공중에 매달릴 만큼 거셌다. 물론 나도 한 걸음 내딛기 힘들 정도였다. 그런데 그 거센 바람이 연출한 갈대숲의 출렁임과 물결의 격랑이 어우러져 그 어디서도 보기 힘든 장관을 만들었다. 시련 없는 아름다움은 진짜 아름다운 게 아님을 그때 느꼈다.

 # 카스티야 수로의 물결은 내가 걸어가는 방향과 반대로 일렁거렸다. 적어도 그렇게 보였다. 그런데 정작 수초더미가 떠내려가는 방향은 그 정반대였다. 도대체 어찌된 일인가? 왜 수초더미가 수로의 물결 방향과 반대로 흘러간단 말인가. 나는 걸음을 멈추고 수로를 응시했다. 이 수로는 프로미스타를 향해 흐르는 수로 아닌가? 나 역시 그 방향으로 나아가고 있고! 더구나 수초더미가 물결을 거슬러갈 순 없다. 그렇다면 저 물살이 가짜다. 바람이 워낙 거세 물결이 내가 걸어가는 반대방향을 향한 것처럼 보이지만 정작 수로의 바닥을 흐르는 물결, 즉 저류는 도도하게 제 방향으로 흘러가고 있었던 것이다. 그렇다. 우리는 늘 착각한다. 바람이 만든 물결만 보고 도저한 저류는 보지 않는다. 아예 보려고도 하지 않는다. 바람 부는 대로 그것이 진짜 방향이라고 애써 믿어버리고 그것을 따르곤 한다. 그래서 세상이 온통 바람 부는 대로 출렁이는 갈대밭이 되지 않았나 싶다. 진정한 흐름은 바람이 아니라 바닥에 있다. 바람에 나부끼는 표피적이고 피상적인 것에 눈멀어 도도히 흐르는 저류를 망각하지 말라. 그 나지막한 경고가 프로미스타로 향하는 카스티야 수로를 따라 걷는 나를 내딛는 발걸음마다 죽비처럼 내려쳤다. “겉으로 보이는 것에 현혹당하지 마라! 바람에 휩쓸리지 말고 바닥의 흐름을 주시하라!”

 # 칸타브리아 산맥 40여㎞를 14시간 동안 휘감아 오르내린 후 갈리시아지방으로 들어섰다. 이제 산티아고 가는 길의 막바지 코스다. 그 옛날 순례자들이 그러했듯이 칸타브리아산맥에서 발원했을 사리아강에 몸을 적신다. 신발만 벗고 옷은 그대로 입은 채 흐르는 강물에 몸을 내맡긴다. 나를 쓸고 훑고 내려가는 물살을, 그 저류를 다시 한번 느껴본다.

정진홍 논설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