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기고 싶은 이야기들] 외환·외자·외곬인생 40년 (2)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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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월街와 첫 접촉

태국 바트화가 폭락하고 우리 나라 은행 동남아 지점 자금 담당자들도 위기감을 느끼고 있던 1997년 6월 나는 홍콩으로부터 영구 귀국했다.

그 해 여름 어느 날 박영철(朴英哲) 당시 금융연구원장(현 외환은행 이사회 의장, 고려대 경제학과 교수)과 골프를 쳤다.

박원장은 내가 부총리 때 청와대 경제수석을 지냈다. 그는 그 날 저녁 정부 사람들과 외환 문제 관련 대책회의를 갖는다고 했다. 나는 원화의 대(對) 달러 환율을 올려야 한다고 말했다.

"제발 환율을 올리라고 하세요. 서둘러 1천 대 1로 올려야 합니다."

"동감입니다. 그런데 그 사람들이 어디 내 얘기를 들어야지요. "

그 때 만약 환율을 올리고 이후로 정부가 무리수를 두지 않았다면 어떻게 됐을까? 외환위기를 비껴가지는 못했을지 몰라도 아마 훨씬 덜 고통스러웠을 것이다.

환율을 인위적으로 끌어올려 수출을 늘리는 것도 문제지만 환율을 인위적으로 억제하면 달러 씀씀이가 늘어나 경상수지 적자 등 부작용이 생기게 마련이다.

모든 경제 정책이 그렇듯 환율도 타이밍이 중요하다. 완전한 정책이라도 타이밍을 놓치면 오히려 큰 피해를 입힐 수 있다.

그러나 만고의 진리지만 역사에 '만약' 이란 없다. 97년 11월 21일 YS 정부는 국제통화기금(IMF)에 긴급 자금 지원을 정식으로 요청했다.

그해 12월 3일에는 임창렬(林昌烈) 부총리(현 경기도지사)와 캉드쉬 IMF 총재가 합의한 IMF 프로그램이 발표됐다.

12월 11일 오후 4시께 부총리 비서실장이 전화를 걸어왔다.

다음 날 아침 몇 사람과 조찬을 같이하자는 연락이었다. 임부총리는 내가 재무장관을 할 때 재무부 국장을 지냈다.

86년 부실기업 정리 때 안기부가 그를 겨냥하고 있어 그냥 두면 다칠 것 같아 내가 그를 IMF 대리이사로 내보내기도 했다.

12일 아침 약속 장소인 르네상스 서울 호텔 일식집에 들어서니 김기환(金基桓) 전 대한무역투자진흥공사 이사장(현 미디어밸리 회장), 김만제(金滿堤) 포항제철 회장(현 한나라당 의원), 주미대사를 지낸 김경원(金瓊元) 사회과학원장, 김우중(金宇中) 대우그룹 회장 등이 나와 있었다.

잠시 어색한 침묵이 흐르다 임부총리가 먼저 "앞으로 어떻게 하면 되겠느냐" 고 운을 뗐다.

말문이 터지자 저마다 일가견을 피력했다. 모두가 내로라 하는 쟁쟁한 사람들이었다. 갑론을박이 이어지고 서로의 의견에 대해 활발한 의견이 오갔다.

문득 70년대 1차 오일 쇼크 때 외자 조달을 위해 해외에서 뛰어다니던 일들이 주마등처럼 스쳐 지나갔다. 이렇게 국내에 앉아 탁상공론할 때가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이럴 게 아니라 우리 내주 월요일 뉴욕서 만납시다."

김만제 회장이 그게 좋겠다고 바로 동의했다. 97년 외환위기 당시 월가와의 첫 접촉은 이렇게 시작됐다.

막상 출국하려고 보니 무직이라 마땅한 직함이 없었다. 궁여지책으로 83년 공직을 떠나 몸담았던 외환은행, 경기고 졸업반이던 52년 부산 피난시절 전란의 와중에 잠시 근무했던 한국은행, 그리고 은행연합회 등 3개 기관의 고문 직함을 급히 마련했다.

15일 저녁 뉴욕행 대한항공 비행기에 오르니 마침 조지프 스티글리츠 세계은행(IBRD) 수석부총재가 타고 있었다.

명함을 내밀고 85년 한국의 은행감독원장을 지냈노라고 내 소개를 하고 말을 나누기 시작했다.

우리는 "외환 통제등의 극단적인 조치 없이 한국의 외환 위기 문제를 해결해야 한다" 는 데 의견이 일치했다.

정인용 前경제부총리
정리〓이필재 이코노미스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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