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인원 학자 구달의 자서전 '희망의 이유'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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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발의 미녀는 침팬지를 좋아한다" "내셔널 지오그래픽 표지모델 소녀" 등 비아냥과 애칭을 들으며 침팬지 연구를 시작, 40년 뒤인 지금은 "호모 파브르(도구를 만들어 사용하는 인간) 에 대한 기존 정의를 바꿔놓은 과학자" "세계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여성 중의 하나" 로 꼽히는 유인원 학자 제인 구달(66) . 1996년 방한했을 당시 그녀의 모습을 기억할지 모르겠다.

사람에 대한 신뢰감으로 연결되는 선한 눈빛의 미소와 자태 말이다.

*** '침팬지 박사' 구달의 자서전

몇년 전 나온 단행본 '제인 구달-침팬지와 함께 한 나의 인생' (민음사) 등도 그녀의 삶을 부분적으로 보여줬지만, 최근 번역된 자서전 '희망의 이유(Reason for Hope) ' 는 전혀 다르다.

삶의 또 다른 면, 즉 자신의 정신적.도덕적 '진화' 과정을 60여년 인생에 대한 회고와 함께 고백해 보인다.

다윈의 진화론에 대한 신봉과 별도로 영성(靈性) 에 대한 성찰 등 종교적 울림이 느껴지는 믿음을 담은 책이 이것이다.

왜 있지 않은가. 삶의 무게가 담긴 자서전.전기물이 주는 가장 강한 설득력 내지 흡인력 말이다.

그것도 논리를 생명으로 아는 서구 자연과학자 한 사람이 생명과 영성에 관한 진지한 통찰을 통해 우리 시대의 화두를 던진다는 것은 이 글을 근대과학의 어떤 변화의 징후로까지 읽히게 한다.

먼저 그녀의 인생 드라마를 보자. 구달과 침팬지의 만남은 상당 부분 운명적인 것으로 보인다. 한살배기 꼬마 구달이 선물로 받은 침팬지 봉제인형 주빌리는 낡아서 털이 다 빠질 때까지 소녀 구달과 생활을 같이했다.

또 지렁이 등 생명있는 모든 것에 보였던 어린 구달의 타고난 친화력에 얽힌 일화들도 흥미롭다.

*** 과학자서 환경운동가로 변신

소설 '타잔' 을 거의 외울 정도로 읽었던 여덟살 소녀는 케냐에 가 있는 옛 급우로부터 뜻밖의 초대를 받아 아프리카 대륙에 첫발을 내딛고, 고생물학자 루이스 리키와의 만남, 그의 권유로 시작한 침팬지 연구, 풀줄기를 이용해 흰개미를 잡아먹는 침팬지 행동의 발견으로 '인간만이 도구를 만들어 사용한다' 는 학설을 뒤엎어버린 사건, 결혼과 출산, 이혼과 재혼, 두번째 남편의 죽음, 그리고 환경운동가로의 재탄생 등 극적인 장면 전환이 이어진다.

구달의 회고는 이런 자연과학적 탐구와 정신적 방황 끝에 이뤄지는 것이라서 더욱 값지다. 실제로 구달은 이렇게 고백한다.

"이렇게 사악한 세상에 아이를 태어나게 한 것이 잘한 짓인지 확신할 수 없었다." 그러한 절망의 순간, 그러나 그녀는 '희망의 이유' 를 발견한다.

"나에게 미래에 대한 희망을 안겨주는 것은 인간의 사랑과 연민과 자기 희생의 자질을 부정할 수 없다는 사실이다. 우리는 종종 정말 잔인하고 악해질 수 있다. 하지만 또한 가장 고결하고 영웅적인 행동들을 할 수 있는 능력도 가지고 있다. "

환경운동의 필요성을 역설하는 방식 또한 감동적이다. 침팬지 데이비드와 처음 교감한 순간의 묘사( "나는 손바닥에다 그 코코야자를 올려놓고 그를 향해 팔을 뻗었다. 데이비드는 나를 물끄러미 쳐다보았고… 내 손을 부드럽게 잡았다… 우리는 말보다 더 오랜 고대의 언어-선사시대 선조들과 함께 공유했던 언어이며, 우리 두 세계를 이어주는 언어-로 의사소통을 했던 것이다" ) 라든가 세계 각국을 돌며 만난, 악몽을 극복하고 '성인(聖人) 에 가깝게 진화한' 사람들의 이야기를 통해 동물과 인간.자연에 대한 사랑, 그리고 그것을 실천으로 옮기려는 마음을 자연스럽게 이끌어낸다.

*** 인류 앞날 따뜻한 눈으로 응시

이러한 구달의 포용력은 어쩌면 여성, 특히 어머니였기에 더욱 가능했을 것이라는 느낌도 책 곳곳에서 묻어나온다. 구달의 여정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칠순을 바라보는 그녀는 "너희의 날들이 남아 있는 한, 너희의 힘도 그러하리라" 는 성경 구절을 되새기며 담담하게 희망을 말한다.

"불가능한 것을 성취한 사람들의 이야기로 가득찬 인류 역사를 돌이켜볼 때 우리는 희망을 가져도 될 것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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