엔화도 한때 1달러=110선 붕괴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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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아시아 국가들의 통화가치가 잇따라 하락하면서 1997년 외환위기의 악몽이 재현될 것인지 불안감을 주고 있다.

각국 정부 및 일부 전문가들은 호전된 각종 경제지표를 내세우며 "그때와는 상황이 다르다" 고 밝히고 있으나 미국 경제의 둔화, 나스닥 시장의 급락과 맞물려 불안감은 가시지 않고 있다.

◇ 엔화로까지 불똥 튀나=일본은 환율 지지선으로 여겼던 달러당 1백10엔대가 뚫리고 닛케이 종합지수가 연중 최저치를 기록하는 등 금융시장이 상당히 불안한 데도 아직까지는 "정정불안 등에 따른 일시적 현상" 으로 여기는 분위기다.

20일 모리 요시로(森喜朗)총리의 불신임안이 부결되면서 정치.경제 구조개혁에 대한 기대가 무산된 데 따른 실망감으로 엔 매도가 이어지고 있으나 상장기업들의 실적이 나아졌고 수출기업들의 외환선물 매수세가 1백10엔대에 몰려 있어 쉽사리 엔이 무너지는 일은 없다는 것이다.

미조구치 젠베이(溝口善衛)대장성 국제국장도 22일 "엔화는 펀더멘털(기초여건)측면에서 볼 때 추가 하락하지는 않을 것" 이라고 말했다.

그러나 일부 시장전문가들은 미국 기업과 투자가들이 12월 미 결산기를 앞두고 이익금 등을 본국에 보내기 위해 달러 매수에 나서고 있는 데다 일본 경제에 대한 실망매물이 쏟아질 경우 엔화의 추가 하락을 배제할 수 없다고 보고 있다.

모건스탠리 딘위터의 이코노미스트 스티븐 젠은 "2조5천억달러에 달하는 미국의 해외자산 규모 중 일본이 차지하는 비중은 12%로 비교적 낮지만 최근 아시아 시장이 불안한만큼 투자자들이 이 돈의 상당부분을 미국으로 회수할 가능성이 있다" 고 진단했다.

◇ 휘청거리는 대만달러=대만달러의 가치는 17개월만의 최저치 기록을 이틀 연속 갈아치우며 21일 미국 달러에 대해 32.50대만달러까지 하락했다.

대만 달러는 지난달 초만 해도 31대만달러 수준에 머물러 있었으나 같은달 17일 32대만달러를 돌파하면서 지속적으로 하락하고 있다.

외환 전문가들은 증시 붕괴조짐과 정치불안 등 악재가 잇따른 것을 주원인으로 지적했다. 대만의 자취안(加權)지수는 20일 심리적 저지선인 5, 000선 밑으로 떨어졌다.

자취안 지수는 지난 5월 천수이볜(陳水扁)총통 취임 당시 8, 800선을 유지했다. 그러나 최근 6개월간 대만 증시를 떠받치는 반도체주가 폭락세를 거듭하면서, 무려 4천2백여포인트가 떨어졌다.

게다가 陳총통의 섹스스캔들, 야3당 연합의 총통 탄핵안 준비 등 끊임없는 정쟁이 증시 붕괴를 부채질하고 있어 금융공황 우려까지 제기되고 있다.

자취안 지수는 대만정부가 20일 외국인 투자한도 상향조정 등 6대 증시 부양책을 발표하면서 가까스로 상승세로 반전했다.

UBS워버그는 반도체주 하락과 정정불안 외에도 은행권의 무수익 여신이 국내총생산(GDP)의 7%에 이르는 등 금융권이 부실해 위기를 가중시키고 있다고 지적했다.

◇ 다른 동남아 통화도 줄줄이 하락=태국 바트화는 연초에 비해 16%, 인도네시아 루피아화는 25%, 필리핀 페소화는 19% 하락, 외환위기 이후 최저 수준을 보이고 있다.

바트화 가치는 태국 의회선거를 앞두고 정국불안이 고조되는 가운데 98년 3월 이후 최저인 달러당 44바트선까지 하락했다.

루피아화도 인도네시아 중앙은행 총재가 부패혐의로 구속되는 등 중앙은행의 권위가 땅에 떨어지면서 98년 10월 이후 최저치인 달러당 9천4백루피아대까지 밀렸다.

페소화도 에스트라다 대통령의 하야 압력이 높아지면서 지난달 말 사상 최저인 달러당 51페소선까지 떨어졌다가 약간 반등해 최근에는 49페소선에서 거래되고 있다.

도쿄=남윤호 특파원, 김현기.주정완.김준술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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