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년시절 추억 그린 만화 '나 어릴적에'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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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아지는 집 앞 골목에 잠들어 있었다. 메마른 코를 꼬리에 묻은 채 낑낑거리던 작고 하얀 강아지. 북실북실한 털에는 검댕이가 군데군데 묻어 있었다. 얼마나 굶었을까. 쭈쭈하고 불렀지만 힘없는 눈을 들어 잠깐 바라볼 뿐 일어서지도 못했다. 머리를 쓰다듬어 주자 없는 힘을 짜내 간신히 꼬리를 흔들며 품 속으로 파고들었다.

다섯 살 꼬마는 강아지를 집으로 안고 갔다. 그러나 기를 수 없었다. 늘 부드러운 엄마였지만 이번엔 완강했다.

"남의 집에 얹혀 사느라 눈치보기 힘든데 너 왜 이러니, 아무데나 똥을 내질러 봐, 좋아하겠니? 어서 버려!"

꼬마는 울었다. 내다버리면 강아지는 틀림없이 굶어죽을 것이다. 아버지가 꾀를 내셨다. 주인집 아이들에게 선물한 것이다. 덕분에 강아지는 살 수 있었지만 꼬마는 한없이 슬펐다.

리얼리즘을 고집하는 우리 시대의 우직한 중견작가 이희재(49)씨의 새 만화〈나 어릴 적에〉(전3권.G&S)는 이를테면 이처럼 작지만 그지 없이 슬프고 아련한 어린 시절의 기억들을 층층이 쌓아 올린 기록이다.

〈청년 노동자 전태일〉〈논리야 반갑다〉등의 저자인 이야기꾼 위기철(40)의 원작〈아홉 살 인생〉을 충실히 만화화한 이 작품은 현재 우리 사회의 허리를 받치고 있는 40대 아버지들의 어린 시절에 대한 회고이면서 가난했지만 그리운 1960년대 말~70년대 초 우리 이웃들에 대한 감상이다.

서울의 산동네. 매일 아침 산중턱 우물에서 물을 길어야 하는 이 동네로 이사한 아홉 살 꼬마와 가족, 그리고 그 이웃들의 일상을 꼬마의 가식없는 눈으로 차분히 그려낸 이 만화를 읽다보면 그 시절 그 냄새가 온 몸을 감싸는 듯 하다.

93~94년 월간 〈소년 중앙〉에 연재했던 것을 6년이 지난 뒤 뒤늦게 단행본으로 펴냈지만 전혀 어색하지 않은 것은 이 만화가 허투른 유행이나 시대 감각에는 초연한 진중한 '작품' 임을 증명한다.

청소년들이 이 만화를 본다면 "아버지도 이렇게 살았어?" 라고 물을 것이다.

그리고 그 아버지가 이 만화를 본다면 아마 힘든 생활 속에서도 아들에게 꿈과 용기를 불어넣어주기 위해 애쓰시던 아버지를 생각하며 뭉클해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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