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건 사랑일까, 호감일까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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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9호 36면

배경은 1870년대 뉴욕. 부유한 변호사 뉴랜드 아처는 지금 너무나 행복하다. 티 없이 순수하고 참한 메이 웰랜드와 약혼하고 주위의 시샘을 한 몸에 받고 있으니까. 하지만 뉴랜드는 자신의 행복이 얼마 지나지 않아 여지없이 흔들릴 것이라고는 꿈에도 짐작하지 못했다. 약혼녀 메이의 사촌 엘렌 올렌스카 백작부인이 유럽에서 뉴욕으로 날아오면서 사단이 발생한 것이다. 결혼 생활이 어긋나면서 위기에 빠진 엘렌을 돕다가 뉴랜드는 그만 그녀에게 호감을 갖게 됐다. 그의 눈에 엘렌은 판에 박힌 예의범절에 찌든 뉴욕 상류층 여성과는 판연히 달랐다. 엘렌은 내면의 감정에 솔직하고 그것을 대담하게 표현하는 여성이었다. 뉴랜드는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엘렌의 매력에 빠져들게 된다.

강신주의 감정 수업 <6> 감정의 착각

미국 문학의 비극적인 팜 파탈 캐릭터를 낳은 이디스 워턴의 소설 『순수의 시대(The Age of Innocence)』는 바로 이런 삼각관계로 시작한다. 영화 속에서 각각 엘렌과 메이를 연기한 미셸 파이퍼와 위노나 라이더의 매력 때문에 더욱 사랑받게 된 작품이다. 결혼을 앞둔 뉴랜드는 본인도 확실히 감지해 내지 못하는 감정들을 무시하고 싶어 한다. 작가는 그의 복잡한 심경을 이렇게 포착한다.

“그는 약혼한 바로 그 순간, 순수한 생각과 밝은 희망에만 차 있어야 할 그런 때에, 건드리지 않고 놔두고 싶은 문제들을 모조리 끄집어내는 추문에 말려든 것이다. ‘엘렌 올렌스카 때문에!’ 그는 난롯불을 덮어 끄고 옷을 벗으면서 투덜거렸다.”
하지만 어떻게 내면에 발생한 감정을 인위적인 노력으로 억누를 수 있단 말인가? 눌린 용수철은 오히려 더 강하게 튕겨져 나오는 법이다. 마침내 뉴랜드는 엘렌에 대한 자신의 감정을 받아들이려고 한다. 물론 그렇게 하려면 뉴랜드는 이미 결혼한 메이와 이혼해야만 했다. 온갖 대가를 치르더라도 뉴랜드는 엘렌과 함께하고 싶었던 것이다. 그렇지만 불행히도 뉴랜드는 자신의 결심을 접어야만 했다. 선택의 순간에 메이가 임신했다는 사실을 알았기 때문이다.

세월이 흘러 이제 지긋한 나이가 된 뉴랜드는 엘렌과 재회할 기회를 얻게 된다. 그렇지만 그는 그녀의 집 창문을 말없이 바라보다가 돌아서고 만다. 『순수의 시대』는 그렇게 막을 내린다. 소설을 덮을 때 우리는 상념에 빠지게 된다. 뉴랜드는 엘렌을 진짜 사랑했던 걸까? 뉴랜드는 왜 엘렌과 재회할 기회를 포기했을까? 의문을 풀기 위해 우리는 스피노자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일 필요가 있다.

“호감(propensio)이란 우연(accidens)에 의해 기쁨의 원인이 될 수 있는 그 어떤 사물의 관념을 수반하는 기쁨이다.” -『에티카(Ethica)』
어떤 사람과 함께 있을 때 기쁨이 발생한다면, 우리는 그 사람을 사랑한다고 할 수 있다. 스피노자에 따르면 “사랑은 외적 원인의 관념을 동반하는 기쁨”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사랑의 기쁨은 필연적인 것이다. 오직 특정한 그 사람만이 나에게 기쁨을 줄 수 있기 때문에 필연적이라는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호감에 대한 스피노자의 정의에서 “우연에 의해”라는 표현에 주목해야 한다. ‘호감’이 주는 기쁨은 사랑이 주는 기쁨과 달리 우연적인 것이다. 다시 말해 호감의 기쁨은 우리가 지금 만나고 있는 사람으로부터 발생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렇다면 호감의 기쁨은 어디에서 유래하는 것일까?

엘렌에 대한 감정이 사랑이 아니라 호감에 지나지 않았다는 것을 자각한 뉴랜드의 사례가 우리의 궁금증을 풀어 준다. 『순수의 시대』를 세밀하게 읽다 보면, 뉴랜드가 청년 시절부터 유럽 작가들의 책들을 읽으면서 유럽에 대한 막연한 동경을 가지고 있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뉴랜드에게 유럽이 동경의 대상이라면, 그 반대로 뉴욕은 환멸의 장소가 될 터였다. 바로 이 대목이 중요하다. 이제 우리는 왜 엘렌의 외모, 그녀의 말, 그리고 그녀의 행동이 뉴랜드의 마음을 기쁨으로 자극했는지 알 수 있다. 뉴랜드가 만일 유럽을 동경하지 않았다면, 그는 결코 엘렌에게 호감을 갖지 않았을 것이다.
이런 점에서 뉴랜드가 유럽에서 배달되어 온 책을 넘기던 장면을 묘사한 소설의 한 대목은 매우 인상적이다. “그 책은 너무나 따뜻하고 풍요롭고 형용할 수 없이 부드러워서, 가장 기본적인 인간의 정열에 새롭고 잊히지 않을 아름다움을 부여해 주었다. 그는 밤새 마법에 걸린 듯 책장 사이로 엘렌 올렌스카의 얼굴을 한 여인의 환영을 좇았다.”

결국 뉴랜드에게 엘렌은 바로 뉴욕에 갇혀 있던 자신에게 날아든 아름다운 유럽이었을 뿐, 엘렌이란 여성 자체는 아니었던 셈이다. 노년의 나이에 접어든 뉴랜드가 엘렌의 집 앞에서 때늦게 자각했던 것이 바로 이것 아니었을까? 자신은 사랑이 아니라 호감에 빠져 있었다는 서글픈 사실을….



강신주. 대중철학자. <철학이 필요한 시간><철학적 시읽기의 괴로움><상처받지 않을 권리> 등 대중에게 다가가는 철학서를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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