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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혁보수’ 3단계 운동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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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4면

김진
논설위원·정치전문기자

한국에서 보수주의가 시련을 겪고 있다. 보수집권당 비상대책위원이 “많은 젊은이가 보수를 꼴통으로 여긴다”는 말을 거침없이 한다. 삭제 논란 끝에 새 정강에서 보수는 ‘보수적 가치’로 쪼그라들었다. 선진국에선 팔팔한 보수가 한국에선 축 처져 있다. 무엇이 잘못됐나.

 현대사 전반부에서 한국의 보수는 나름대로 중심을 잡아왔다. 일부 독재와 부패가 있었지만 국가발전에 결정적으로 기여했다. 이승만은 급진진보 공산주의에 맞서 보수주의로 국가를 건설했다. 자유시장경제, 토지개혁, 교육확대, 그리고 반공과 한·미 동맹이 중심 기둥이었다. 혁명가 박정희는 보수주의 개발독재로 나라를 지키고 산업화·근대화를 이뤄냈다. 경제개발로 민주화의 경제적 토대까지 마련했다. 전두환의 우여곡절을 거쳐 보수세력은 1988년 노태우 집권에 성공했다.

 산업화·민주화 이후 보수세력은 국가의 선진화를 주도했어야 했다. 이를 위해선 강한 도덕성이 필요했다. 특정 세력이 아니라 공동체 전체를 위한다는 걸 증명하는 것이다. 그런데 보수세력은 3당 합당으로 국민의 기대를 배반했다. 1990년 3당 합당은 위험한 야합이었다. 2년 전 국민은 여소야대를 만들었다. 그런데 노태우·김영삼·김종필은 3당을 합쳐버렸다. 가치동맹이라 했으나 철저한 이익동맹이었다. 진보를 고립시켰고 영남과 충청이 합쳐 호남을 코너로 몰았다. 이념·지역적으로 국가를 두동강낸 것이다.

 3당 합당이란 위장극은 곧바로 정체를 드러냈다. 민정·통일민주·공화 세력은 수년 만에 갈갈이 찢어졌다. 김영삼 집권 보수세력은 부패와 무능으로 치달았다. 아들·측근은 감옥에 갔고 국민은 IMF로 갔다. 보수세력의 참담한 실패 속에서 김대중 진보정권 집권은 역사의 필연이었는지 모른다.

 진보정권 10년이 끝나고 보수세력에 다시 기회가 왔다. 이명박 대통령이 당선된 것이다. 그러나 그는 보수주의 재건에 실패했다. 광우병 촛불에 데이자 중도실용이라는 엉성한 이념으로 도피했다. 그러고는 방황했다. 개혁도 못하고 전두환·노태우·김영삼의 구태 통치를 고스란히 재연했다. 측근·친인척 부패까지 복사판이다. 운도 없어 세계적인 양극화까지 겹쳤다. 민심은 출렁이고 보수주의는 다시 위기를 맞고 있다. 어찌 해야 할지 보수주의의 고민이 깊다.

 한국의 보수는 다시 태어나야 한다. 원래의 가치를 되살리고, 도덕성의 구멍을 메우며, 현실적인 적응능력을 키워야 한다. 보수주의는 국가 정체성이나 안보 같은 ‘이념Ⅰ’에서는 양보해선 안 된다. 대신 경제·복지·세금이나 약자 배려 같은 ‘이념 Ⅱ’에서는 현실적인 유연함을 보이는 것이다. 미국·영국에서 발흥한 온정적 보수주의(compassionate conservatism)다.

 도덕적이고 원칙적이며 동시에 따뜻한 보수… 이를 ‘개혁보수’라 부르면 어떨까. 오물투성이 보수가 다시 태어나려면 강력한 정풍운동이 필요하다. 자신을 먼저 수술해야 남의 병을 공격할 수 있는 것이다. 개혁보수는 3단계 운동이 필요하다.

 1단계는 이명박 정권을 단죄하는 것이다. 보수 시민세력은 ‘이상득·최시중·박희태’ 청문회를 열어야 한다. 무엇이 어디서부터 잘못됐는지 보수가 파헤쳐 국민 앞에 내놓는 것이다. 2단계는 차기 주자들에게 도덕성 서약을 받는 일이다. 박근혜·정몽준·김문수를 부른다. 그리고 친인척 감시기구를 만들고 낙하산 인사를 금하며 올바른 인재를 광범위하게 등용한다는 약속을 받는 것이다.

 3단계는 보수가치를 지켜내는 생사(生死)의 투쟁이다. 개혁보수는 진보·좌파의 선동적 총선·대선 전략과 맞서야 한다. 앉아있지 말고 일어나 외쳐야 한다. 한·미 FTA 폐기나 전면 무상복지, 정봉주법 같은 게 얼마나 위험한 것인지 국민 앞에 고발해야 한다. 대(大)토론회를 열어 TV 앞에서 누구의 길이 옳은지 무한 논전(論戰)을 벌이는 것이다.

 선진국에서 보수주의가 살아 있는 건 스스로 개혁하기 때문이다. 한국의 보수도 개혁해야 한다. 개혁 보수가 살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