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앙시평] 불안정한 시기엔 ‘부드러운 리더십’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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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9면

장달중
서울대 교수·정치외교학

흔히들 정치의 질은 국민 수준과 비례한다고 한다. 그래서 정치가 잘못되면 으레 그것은 국민 탓이라고 말한다. 얼마 전까지 우리 사회에 회자되고 있던 현상이다. 그러나 지금 황량하고 살벌한 우리 정치를 국민 탓이라고 말하는 사람은 거의 없다. 연말 모임에 가 보면 너나 할 것 없이 일차적인 책임은 여당, 특히 대통령에게 있다고 말한다.

 정치 지도자들의 개성은 시대마다 다르다. 하지만 그들의 개성과 행동은 그 나라의 정치에 절대적인 영향을 미친다. 루스벨트나 아이젠하워, 부시나 오바마 대통령의 개성은 다양하지만 이들의 개성과 행동을 보고 우리는 미국 정치의 질(質)에 대한 평가를 내린다. 우리의 경우도 다를 바 없다. 하지만 흥미롭게도 우리 대통령들의 경우 개성은 다양하지만 하나같이 투쟁적인 행동파들이다. YS, DJ, 노무현 그리고 MB가 하나같이 그랬다. 바로 이 투쟁적 리더십이야말로 우리 정치의 질을 판가름해온 바로미터였다. 지금 전쟁터 같은 우리 정치판이 하나도 이상스럽지 않은 이유다. 대권을 꿈꾸는 사람들이 반드시 거쳐야 할 통과의례처럼 여겨지고 있기 때문이다.

 흔히들 말한다. 역사에서 같은 일은 반복되지 않는다고. 하지만 대권을 꿈꾸는 우리 정치가들을 보면 반드시 그런 것 같지만은 않다. 전임 대통령들의 모습을 떠올리기라도 하듯 투쟁적인 욕망을 제어하지 못하고 있는 모습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국민들은 더 이상 이런 리더십을 용납하지 않을 모양새다. 내년 대선에서 국민이 가장 선호하는 것은 투쟁적인 리더십이 아니라 ‘국민의 아픈 곳을 헤아릴 수 있는 부드러운 리더십’이다(R&R-동아일보 세대별 정치사회의식 조사). 부드러운 리더십을 선호하는 응답이 67.2%로 강력한 리더십을 선호하는 응답 30.1%보다 배 이상 높다. 이런 현상은 ‘일방통행형으로 비치는’ 이명박 대통령의 리더십에 대한 반작용이라는 해석을 낳고 있다.

 그러나 우리가 눈여겨봐야 할 게 하나 있다. 작금의 MB리더십에 대한 반작용은 ‘보복적’인 성격의 것은 아닌 것 같다는 점이다. MB의 압도적 승리는 이른바 ‘좌빨’ 리더십에 대한 보복적 반작용이었다. 하지만 여론은 더 이상 이런 보복적 반격을 허용할 것 같지 않아 보인다. 대신 보복의 악순환을 넘어서는 ‘치유적인’ 반작용의 모습을 보일 것으로 예상된다. 따라서 내년 선거에서 이런 노선을 벗어나 ‘좌빨 척결’이니 ‘수구꼴통 타도’니 하는 전쟁 같은 선거전을 치르는 세력은 누구든 낭패를 면키 어려울지 모른다.

 미국에서도 재임 기간 중은 물론이고 퇴임 후에도 가장 높은 지지율을 누린 대통령은 ‘부드러운 리더십’의 아이젠하워였다. 20년 만에 처음으로 공화당 집권을 이룬 그는 재임 중뿐만 아니라 퇴임 후에도 65%가 넘는 가장 높은 국민적 지지를 누린 대통령이었다. 30%도 안 되는 지지율에 허덕이는 우리 대통령들의 문제가 무엇인지 시사하는 바가 적지 않다.

 아이젠하워의 트레이드마크는 온화한 영향력(calming influence)이다. 그는 2차대전과 한국전쟁에 시달려 온 미국에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은 온화한 정치라고 믿었다. 그래서 그는 부드러운 통치 기풍을 진작시키려 노력했다. 강력한 리더십을 발휘하지 않는다는 세간의 비판에 대해 “모든 지혜가 대통령에게 있다는 생각이야말로 헛소리”라고 일축했다.

 아이젠하워에게 리더십의 요체는 ‘설득과 화해, 교육과 인내’였다. 그는 자신을 보수주의자라고 여겼지만 ‘매우 리버럴한 보수주의자’로 처신했다. 그리고 유세 중인 정치인들에게 조언하기를 잊지 않았다. “너무 심각하게 보이지 마라. 미소 지어라! 사람들이 손을 흔들면 같이 손을 흔들어 주라”고 외쳤다.

 김정일 국방위원장의 사망으로 남북 간에는 물론이고 남남 간에도 긴장이 조성되고 있다. 내년 선거가 더욱 전쟁같이 치러질지 모른다는 우려가 제기되고 있다. 하지만 북풍이 예전처럼 영향을 미칠 가능성은 희박하다. 부드러운 리더십을 선호하는 여론은 북한과의 안정적인 관계를 바라고 있기 때문이다.

 물론 정치라고 하는 비즈니스는 권력투쟁과 떼려야 뗄 수 없다. 내년 총선과 대선에서도 권력을 쟁취하기 위한 전쟁 같은 선거전을 피하기 어려울지 모른다. 하지만 과연 앞에 놓인 긴장을 헤쳐가야 할 작금의 우리 현실이 전쟁 같은 선거전에 매몰되어야 할 상황일까. ‘불안정한 다수(restive majority)’를 안정시키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다. 아이젠하워의 리더십이 던지는 메시지이기도 하다.

장달중 서울대 교수·정치외교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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