슬로바키아 “우리보다 잘사는 그리스 왜 돕나”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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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 04면

유럽 재정안정기금(EFSF) 증액이 미뤄질 듯하다.

 슬로바키아 의회는 12일(한국시간) 기금 증액에 참여하는 법안을 부결시켰다. 슬로바키아는 기금 증액의 마지막 관문이었다. 이미 16개국 의회는 증액안을 승인했다.

 기금은 그리스 사태가 이탈리아·스페인 등으로 전염되는 것을 막기 위한 방파제다. 이날 슬로바키아 의회의 부결로 방파제를 한결 높게 쌓는 일이 차질을 빚게 된 셈이다. 유로존(유로화 사용권)은 슬로바키아 의회의 승인이 이뤄지면 즉시 기금을 증액하는 작업에 뛰어들 예정이었다. 올 7월 유로존 정상들의 합의에 따라 모든 회원국이 동의해야 기금 증액이 가능하다.

 이베타 라디코바 슬로바키아 총리는 이번 표결을 정부 신임과 연계했다. 배수진이었다. 하지만 제2 여당인 자유와연대(SaS)가 “유로존에서 두 번째로 가난한 슬로바키아가 우리보다 잘사는 그리스를 도울 순 없다”며 반대해 부결됐다. 기존 연립정부는 중도 우파 4개 정당으로 구성돼 있다.

 파이낸셜 타임스(FT)는 “자유와연대 당수인 리처드 술릭이 ‘내 아이들 앞에서 부끄러움을 느끼는 것보다 차라리 (유럽연합 본부가 있는) 브뤼셀의 반역자가 되겠다’며 완강히 버텼다”고 전했다.

 라디코바 총리는 서둘러 다시 의회 동의 절차를 밟을 예정이다. 하지만 의회의 불신임으로 내각이 해산돼 다시 정부를 꾸려야 한다. 로이터 통신은 “라디코바 총리가 기금 승인과 연립정부 구성을 놓고 제1 야당인 스메르 쪽과 빅딜을 시도할 가능성이 크다”고 전했다.

 스메르 당수인 로베르토 피초 전 총리는 “우리는 증액안 표결에 대해 논의할 준비가 돼 있다”며 “총리가 먼저 안을 내놓을 차례”라고 말했다. 그는 이날 표결 전에 “슬로바키아는 기금 증액안을 승인해야 한다”고 말해 왔다. 런던 금융시장 사람들이 빅딜이 이뤄질 가능성을 크게 보는 까닭이다.

 FT와 로이터 통신은 “런던 자금시장 참여자들은 기금 증액안이 이르면 이번 주안에 통과될 것으로 보고 있다”며 “하지만 이는 라디코바 총리가 새로 내각을 구성하는 일이 순조롭게 이뤄져야 가능한 일”이라고 보도했다.

 유로존 회원국들은 올 7월 2차 그리스 구제안 가운데 하나로 기금 증액을 결정했다. 지급보증을 최대 7700억 유로(약 1194조원) 늘리는 방법을 통해서다. 특수목적법인인 기금은 회원국 보증을 바탕으로 채권을 발행해 자금을 조달한 뒤 이탈리아·스페인 국채 매입뿐 아니라 유로존 시중은행 자본 확충에도 돈을 댈 요량이다.

 FT는 “슬로바키아 의회가 다시 기금 증액안을 부결한다면 독일과 프랑스는 플랜 B(비상대책)를 실행해야 한다”며 “슬로바키아를 보증국에서 제외하는 게 비상대책”이라고 보도했다.

한편 이달 말 퇴임하는 유럽중앙은행(ECB) 총재인 장 클로드 트리셰는 11일 “유럽이 시스템 위기 상황에 직면하고 있다”며 “정치 리더들이 신속하게 대응해야 한다”고 주문했다. 그는 “유럽 위기 상황은 일시적이거나 부분적인 게 아니다” 고 덧붙였다.

강남규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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