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기고] 청춘은 맨발이다 (116) 들국화는 피었는데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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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7면

이만희 연출, 신성일 주연의 전쟁영화 ‘들국화는 피었는데’(1974). 신성일(왼쪽)은 강원도 인제에서 촬영할 때 폭발 사고로 큰 부상을 입었다. [한국영상자료원 제공]

1973년 여름 파리에서 신상옥 감독의 ‘이별’을 두 달간 촬영했다. 이어 9월 말에 이만희 감독의 전쟁영화 ‘들국화는 피었는데’(선우휘 원작)에 합류했다. 촬영은 강원도 인제에서 진행됐다.

 ‘들국화는 피었는데’는 임권택 감독의 ‘증언’과 함께 영화진흥공사가 제작한 작품이다. 영화진흥공사는 국시(國是)가 반공인 만큼 반공사상을 고취하고자 했다. 하지만 이 감독은 ‘7인의 여포로’(1965) 때처럼 반전사상을 표현하고자 했다. 촬영 중반 이 감독과 영화진흥공사 진흥이사인 정진우 감독이 충돌했다. 정 감독은 현장에서 “제작 중단”을 외치고는 서울로 올라가버렸다.

 이 감독은 제작비 때문에 작품을 고칠 사람이 아니었다. 나는 이 감독에게 “짱구형, 타협합시다. 우리, 다음 작품 ‘삼포로 가는 길’(황석영 소설 원작) 잘 찍읍시다”라고 권유한 후 서울로 갔고, 내 친구인 정 감독에게도 촬영을 재개할 수 있도록 부탁했다.

 산골 지역이라 가을 추위가 일찍 왔다. 나와 이 감독은 인제의 한 여관방을 같이 쓰고 있었다. 이 감독의 건강이 무척 좋지 않았다. 기침을 하고, 밤이 되면 남산의 고문 후유증으로 양쪽 무릎이 절인다고 했다. 인제에선 송이버섯이 제철이었다. 그의 건강이 걱정됐다. 나는 여관 옆 불고기집에서 저녁마다 송이버섯에 불고기로, 아침마다 뱀탕으로 그의 몸을 챙겼다.

 촬영 막바지, 인근 군부대의 연대 병력과 연대 소속 탱크가 동원됐다. 댐 건설로 수몰 직전인 농가를 상대로 마음껏 폭약을 터트렸다. 미국에서 무상 군수물자를 원조 받던 시절이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내가 황토로 단단히 지어진 곡물 창고에서 뛰어나오고 동시에 폭발하는 장면에서 사고가 났다. 폭파 감독이 탱크 소리에 놀라 미리 폭탄을 터트리는 바람에 창고 안의 부스러기가 내 등을 때렸다. 나는 ‘아이쿠’ 소리와 함께 허리를 움켜쥐고 공중에 떴다가 카메라 앞으로 떨어졌다. 각목이 내 권총 벨트 허리 중심을 때려 큰 부상은 피했다. 군복 뒤쪽은 온통 구멍이고, 등판은 상처투성이였다. 그 각목이 목 부분을 때렸다면 불구가 됐을지도 모르겠다.

 나는 인제 병원으로 후송됐다. 서울에서 소식을 접한 어머니(김연주 여사)가 아내, 형수와 함께 인제로 달려왔다. 다음은 당시 심정을 쓴 어머니의 시 ‘코스모스는 피었는데’(1974년 시집 『잔묵』에 수록)의 일부다.

 ‘들국화는 피었는데’ 촬영현장 / 인제에서 / 포탄에 또 부상당했다 한다. / 웬일이냐 / 깨고 다치고 부수고 / 찢어지고 부러지고 / 만신창이인 그 몸에 / 또 어디 다칠 데가 남았더냐

 

 조이는 가슴 안고 / 인제 가도를 달린다

 

 (중략)

 등에 부상 붕대를 감고 / 군복 덮어 입고 계속 촬영 중이란다. / 그런 것이 너의 인생…

 

 이 감독과 콘티를 상의해온 나는 동원된 병력이 그 날 철수한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도저히 병원에 누워있을 수 없었다. 지프차를 몰고 현장으로 돌아갔다. 그는 내가 병원 있는 동안, “내가 우리나라 최고 배우 하나 병신 만들었구나”라고 울먹였다 한다. 지프차에서 내린 나는 이 감독을 보자마자, “짱구형, 우리 촬영 합시다”라고 외쳤다. 이 감독은 굵은 눈물을 흘렸다.

정리=장상용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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