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날, 이쪽도 저쪽도 아닌 완벽한 이방인을 봤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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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8면

“타인을 속속들이 알 수 없겠지만 이해하려는 노력마저 포기해서는 안 된다”고 말하는 소설가 조해진씨. [오종택 기자]

물이 반쯤 채워진 잔에서 어떤 느낌을 받는지를 묻는다면 소설가 조해진(35)씨는 “텅 빈 반쪽 공간이 가슴 아리다”라고 답할 것만 같다. 낙관적인 ‘반이나 남았네’나 비관적인 ‘반밖에 남지 않았네’의 이분법적 반응을 뛰어 넘어 조씨는 채워지지 않은 반 잔의 아픔과 고독, 헛헛함을 안타까워하는 쪽이다.

 1976년 서울에서 태어나 2004년 문예중앙 신인문학상으로 등단한 조씨는 그간 소설집 『천사들의 도시』와 장편 『한없이 멋진 꿈에』 등을 냈다. 에이즈 환자, 노숙자, 동성애자, 시력을 잃어가는 연극배우, 우즈베키스탄 출신 고려인 아내 등을 주로 다뤄왔다. 하나같이 잔을 못 채운 이들이다.

 조씨가 새 장편 『로기완을 만났다』(창비)를 냈다. 이번에 그의 시선은 생존을 위해 조국에서 탈출했지만 그나마 조국의 국경 밖에서는 난민 신세를 면할 길 없는, 탈북자에게로 향했다. 새로운 소재를 붙잡았으되 조씨가 이를 요리하는 방법은 이전 그대로다. 탈북 난민이라는 국제적 현안을 해결할 묘책 같은 걸 제시하지는 않는다. 낯선 언어와 환경에 처한 탈북 난민이 겪는 고통을 상세하게 전할 뿐이다. 고통의 적나라한 묘사를 통해 연민을 자아낸다고 할까.

 소설의 등장인물은 한결같이 상처를 가진 이들이다. 먼저 제목에 나오는 탈북자 로기완. 1987년 함경북도 온성군 세선리 제7작업반에서 태어난 로기완은 살기 위해 어머니와 함께 중국으로 탈출한다. 낮에는 목욕탕에서, 밤에는 노래방에서 도우미로 일하며 생계를 이끌어 나가던 어머니가 어느 날 아침 교통사고로 허망하게 세상을 뜬다. 로기완에게 남은 유일한 선택지는 서유럽행. 그는 어머니의 시신을 판 돈 4000달러를 들고 중국인 틈에 섞여 벨기에로 향한다.

 로기완이 벨기에에서 경험하는 어려움은 소설의 화자 김 작가를 통해 실감나게 복기(復棋)된다. 형편 어려운 이들을 다루는 TV 다큐멘터리 대본을 쓰는 김 작가 역시 씻을 수 없는 과오로 인한 상처를 갖고 있는 인물이다.

프로그램의 극적인 연출을 위해 열일곱 소녀의 얼굴 혹을 제거하는 수술 날짜를 연기했다가 악성종양으로 번진 것. 죄책감을 덜기 위해 김 작가는 3년 전 로기완의 벨기에 행적을 그대로 따라간다. 그가 묶었던 저렴한 호스텔을 찾아 똑같은 방에 투숙하고, 수중에 돈이 떨어진 로기완이 했던 대로 맥도널드 매장 화장실에서 빵을 삼킨다.

 타인의 고통을 똑같이 경험한다고 해서 진짜 연민, 고통에의 진정한 동참은 가능한 것일까. 또 그런 경험을 통해 김 작가는 자신의 문제, 즉 죄책감에서는 벗어날 수 있는 것일까. 그런 질문에 대해 소설의 대답은 긍정적이다. 물론 거기까지 가는 과정은 우울하고 절망적인 과정의 연속이다.

 조씨는 “내가 어디 한 군데 귀속되어 일하는 사람이 아니어선지 이쪽에도 저쪽에도 끼지 못하는 경계인에 자연스럽게 관심을 갖게 됐다”고 말했다. “우연찮게 서유럽의 탈북 난민을 다룬 시사주간지 기사를 보게 됐고, 완벽한 이방인 혹은 경계인에 대해 써보고 싶은 생각이 들었다”고 했다.

 조씨는 소설을 쓰기 위해 2008년 2주일간 벨기에 현장 취재를 했다. 소설 속 김 작가가 그랬던 것처럼 현지 교민을 만나 자문을 받았고, 실제 탈북자의 난민신청 자술서를 입수하기도 했다. 조씨의 희망은 “소설인지 아닌지 구분되지 않을 정도로 디테일이 충실한 소설을 쓰는 것”이다. 그런 목표는 이번 소설에서도 어느 정도 이뤄진 것 같다.

글=신준봉 기자
사진=오종택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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