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OOK] 28세 그녀가 죽어갈 때 38명은 어떻게 외면했나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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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2면

누가 제노비스를 죽였는가
디디에 드쿠앵 지음
양진성 옮김, 황금가지
232쪽, 1만원

미국 사회의 근본을 뒤흔든 한 살인사건을 철저하게 추적하고 낱낱이 해부한 소설이다. 1964년 3월, 광기 어린 충동에 사로잡힌 채 뉴욕의 새벽 거리에서 사냥감을 찾던 살인마 모즐리의 눈에 띈 28세 여성 키티 제노비스. 살인마는 그녀의 등에 칼을 꽂고, 비명을 질러대며 반항하는 그녀와 격투를 벌인다. 길 건너에서 그 처절한 울부짖음을 듣고 창 너머로 바라 본 38명의 목격자 중 누구도 여인을 구하기 위해 집을 나서거나 경찰에 신고하지 않았다.

 가까스로 악마의 손아귀를 벗어난 제노비스는 집을 향해 무거운 걸음을 옮기지만 다시 되돌아 온 살인마는 이웃 주민의 비겁과 방관을 잘 알고 있다는 듯 30분 넘게 제노비스의 온 몸을 칼로 난도질하고 성폭행한 뒤 유린했다. 프랑스 최고 권위의 공쿠르문학상 심사위원장을 맡고 있는 저자는 38명의 이웃을 감히 ‘살인 공범’으로 규정하며 규탄한다. 도발적이다. 이 도발은 단지 이들 38명에게만 향한 것이 아니다. 이웃의 목숨보다 자신의 편의와 이익을 더 중시하는 평범한 모든 인간의 본성적 비겁함에 대한 도발이다.

1964년 뉴욕에서 처참하게 살해된 제노비스. 이웃에 대한 현대인의 무관심이 부른 비극이었다.

 ‘제노비스 사건’은 미국뿐 아니라 전 세계 모든 사회에 인간의 ‘무책임한 방관자로서의 실체’를 적나라하게 드러내며 충격을 던져주었다. 심리학계에서는 이 사건을 모델로 삼아 ‘책임의 분산 효과’ ‘방관자 증후군’ 등의 신개념과 이론을 쏟아냈다.

 2003년 8월 영국 리버풀. 쇼핑몰에서 잠시 엄마 손을 놓친 4살 제임스 벌져군이 두 명의 10대 소년에게 끌려 매를 맞아가며 4㎞를 이동하는 동안 이들과 마주쳐 위험을 느낀 38명의 어른들 중 누구도 적극적으로 개입하지 않았다. 결국 제임스는 참혹하게 살해되었다. ‘제노비스 사건 38명의 목격자’가 ‘리버풀 38인’이라는 이름으로 재현된 것이다.

 우리나라 역시 예외는 아니다. 2009년 6월 4일 오후 8시, 적지 않은 행인과 영업 중인 가게가 밀집한 아파트 단지 앞 도로에서 심부름 다녀오던 10살 초등학생이 승합차에 살짝 부딪치는 교통사고가 발생했다. 아이는 바로 일어나 울며 집 쪽으로 달려갔고 운전자는 차에서 내려 아이를 뒤쫓아 갔다. 아이를 잡은 40대 운전자는 아이와 몇 마디 이야기를 나누더니 차로 데려와 태우고는 출발했다. 커다란 급제동 소리가 주의를 끌어 여러 명의 행인과 상인들이 이 이상한 광경을 목격했지만, 누구도 나서 제지하거나 아이 부모에게 연락을 해야 하지 않겠느냐는 질문을 던지거나 경찰에 신고하지 않았다. 결국 아이는 온몸에 공기총을 맞아 참혹하게 숨진 시체로 발견되었다. 음주운전으로 면허정지 상태에서 다시 음주운전을 하다 사고를 내자 신고하지 못하게 하겠다는 생각에서 벌인 참극이었다.

 64년 미국 뉴욕에서 일어난 ‘제노비스 사건’은 지금 우리에게 유효하고 중요하다. 소설을 읽는 과정에서 독자는 때로 구토가 나올 정도로 세밀하고 적나라한 ‘악마적 범행과 비겁한 방관’의 묘사를 견뎌내야 한다. 하지만, 자칫 극도로 이기적일 수 있는 우리 모두가 이타적 본성을 지키고 키워낼 필요성을 절감하게 될 것이다. 별 생각 없이, ‘아무 짓도 하지 않고’, 살인의 공범이 되고 싶지 않다면, 반드시 이 책을 읽어보길 권한다.

표창원(경찰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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