농협 전산장애 때문에…남자 자존심 구길 수 없어 2시간 걸었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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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의도 금감원 빌딩 지하에 있는 고장난 농협 현금지급기.

농협 전산장애 마비사태가 발생한 지 20일로 9일째다. 고객들의 불편은 이만저만 아니다. 일부 피해자들은 집단소송 움직임을 보이고 있다. 이런 가운데 네이버에 개설된 ‘농협 전산장애 피해 카페(http://cafe.naver. com/ims300)’ 회원 수가 1400여 명을 넘어섰다. 하나같이 울화통 터지는, 구구절절한 사연들이다. 21세기 이런 황당한 일을 겪은 대한민국 농협인들, 범인(凡人)의 육성을 들었다.

◇걸었다, 굶었다, 못샀다=신용카드를 발급받을 수 없는 10대에겐 체크카드가 전부다. 네티즌 ‘gusw****’는 “졸업사진을 찍기 위해 옷을 사려고 농협에 돈을 넣어놨는데 체크카드가 안돼 결국 두꺼운 겨울 옷을 입고 찍었다”고 토로했다. 평생 기억에 남겠다는 냉소적 반응과 함께. 네티즌 ‘jiho****’는 “새벽 2시 여자친구를 데려다 주고 편의점 현금지급기에서 돈을 인출해 택시를 타려고 했는데 ‘전산장애’가 떴다”며 "결국 집까지 두시간 동안 걸어갔다”는 아픈(?) 사연을 올렸다. ‘진***’은 “13일 소녀시대 공연 티켓을 사려고 했는데 농협 거래가 정지되는 바람에 때를 놓쳤다”며 “농협 나빠요”라고 적었다. 친구들과 놀러갔다 하루종일 굶은 사연, 용돈을 주겠다며 농협에 갔다 빈손으로 온 엄마에게 “왜 거짓말 하느냐”고 따져 혼났다는 사연, 티머니를 충전하지 못해 버스를 못탔다는 사연 등 각양각색이다.

◇“아, 대망신”=20~30대 사연 중엔 물건을 구입할 때 ‘카드사 문의 요망’ ‘결제 안됨’ 표시가 나와 망신을 당했다는 내용이 적지 않았다. 네티즌 ‘우**’는 “학생인 동생에게 차비를 못보냈다. 자존심 강한 아이라 누구한테 빌려달라고 말도 못했을텐데 왕복 두 시간을 걸었을 동생 피해는 어떻게 입증하나”라고 따져 물었다. 지방에 살다 서울에 놀러왔다는 ‘니**’는 “백화점 화장품 매장에서 30분 동안 풀메이크업을 받고 제품 설명까지 듣고 물건을 사려했는데 고장이 났다”며 “직원들이 서로 눈치를 보며 잔액이 부족한 것 아니냐고 물어 창피했다”고 말했다. ‘자취방세를 못냈다’ ‘연체료를 물어 신용이 떨어질 것 같다’는 등의 사연도 줄을 이었다.

◇“월급통장 당장 바꾸겠다”=농협 사태가 진정되면 당장 월급통장부터 바꾸겠다는 이야기가 상당수를 차지했다. ‘농협 체크만이 나의 유일한 재산목록 1호’라고 밝힌 네티즌은 “직장인이라 아이 학원비, 엄마 용돈 등 폰뱅킹만 사용했는데 전산장애라니 어이가 없다”며 급여이체통장 교체를 공언했다. ‘하**’응 “아이 기저귀를 사려고 마트에 갔는데 카드가 안됐다. 다음날도 안됐다”며 “지금 가장 큰 문제는 아이 기저귀가 달랑 3장 남았는데 못산다는 것, 물티슈 한팩, 현금 3000원…속 터져 못살겠다”고 말했다.

‘in**’은 “농협 정상화만 되면 당장 다른 곳으로 갈아탈 것”이라고 으름장을 놨고 ‘하**’는 “주말에 거래처 접대 자리가 있었는데 카드가 안돼 분위기가 깨졌다. 보상은 바라지도 않을테니 제발 빠른 복구를 부탁한다”고 읍소했다. ‘작**’은 “친정 엄마 생신 상을 차려드리려 장을 봤는데 카드가 안돼 포기했고 엄마한테 빌린돈 30만원도 못갚았다. 아버지는 내가 낼 테니 괜찮다고 하시는데 왈칵 눈물이 났다. 가뜩이나 어려운 살림인데 오늘처럼 마음이 무겁고 슬픈 적이 없었다”고 토로했다.

이지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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