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손은 말굽으로 변하고 (65)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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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러스트 ⓒ 김영진, heakwan@ymail.com

가족회의, 본능적으로 10

노과장의 후임으로 위치가 승격하는 셈이었으니 나로서는 나쁠 것이 없었다. 명안진사 안팎을 마음대로 돌아다닐 수 있게 되었다는 뜻이기도 했다. 백주사는 이사장의 결정이 마음에 들지 않는지 잔뜩 이마를 찡그렸다. 세족(洗足)의 의식이 진행 때쯤 나갔던 김실장이 이때 다시 방으로 들어왔다. 김실장은 말이 없는 사람이었다. “그럼 문지기 아저씨, 더 높아진 거네!”라고 애기보살이 말했고, 누가 먼저랄 것 없이 사람들이 박수를 쳤다. 김실장만이 그냥 묵묵히 앉아 있었다.

이사장은 포도주를 연거푸 마셨다.
M자머리와 김실장이 대작을 주로 하는 편이었으며, 애기보살이 간간이 잔을 비웠다. 으레 그래온 듯, 아무도 애기보살이 술을 마시는 걸 말리지 않았다. 애기보살의 볼은 잘 익은 사과처럼 붉었다. 이사장은 아주 만족스러운 눈치였다. 그의 표정은 이제 최후의 만찬을 주선한 그리스도가 아니라 온 가족을 모아놓고 기분이 좋아진 덕성스런 아버지에 가까웠다. 금방이라도 구수한 옛날이야기가 그의 입에서 나올 것 같았다.

“밖에, 눈 와요!”
애기보살이 창 쪽으로 달려가며 소리쳤다.
정말 운악산 정수리가 눈발에 뿌옇게 흐려져 있었다. 이제 어둠이었다. 관음동 마을 불빛은 어둠이 깊어지면서 한결 가까이 다가들었다. 우뚝하게 솟은 이곳, 샹그리라를 경배하면서 다소곳이 엎드린 마을이었다. 샹그리라야말로 관음마을의 성이었다. 207호실의 젊은 순경에 따르면, 연말을 맞아 이사장은 관내 모든 관공서 직원들에게 이미 선물을 다 돌렸다고 했고, 동사무소엔 소외받은 이웃을 위해 쓰라면서 따로 거금의 성금을 보냈다고 했다. 부처는 ‘자비심을 알고 행하지 않으면 알지 못하는 것과 같다.’ 하셨고, 그리스도는 ‘천사의 말을 할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소리 나는 꽹가리일 뿐’이라 하셨다. 이사장은 중생에게 자비와 사랑을 행함으로써 구제(救濟)의 본보기를 보인바, 샹그리라가 우뚝한 것 또한 모두 그 덕택이었다.

“쇠피리 한번 불어봐, 애기보살님.”
“우리 관음은, 춤과 노래가 더 이쁘지!”
백주사의 말을 미소보살이 냉큼 받아넘겼다.
식이 끝났으니 연희(演戱)가 시작되는 건 당연한 순서였다. 애기보살의 얼굴에 금방 웃음이 피어났다. 애기보살은 그 천진함으로 보건대 어쩌면 정신적으로 아직 유치원생인지도 몰랐다. 이사장은 애기보살을, 모든 이에게 오로지 ‘감미’의 향기가 되도록 양육해왔을 터였다. 학교를 안 가기 시작한 것도 꽤 오래된 눈치였다. “마음이 순수하면 하나님을 볼 것이다. 마태복음에 있는 말일세. 관음이 그렇지.” 때맞추어 이사장이 말했다. 자랑스런 표정이었다. 애기보살에게 세상의 얼룩이 들어와 박히지 않도록 양육해온 자부심이 그의 표정에 아낌없이 떠올라 있었다. 애기보살이 춤추면서 노래를 하기 시작했다.

본능적으로 느껴졌어 넌 나의 사랑이 된다는 걸.
처음 널 바라봤던 순간 그 찰나의 전율을 잊지 못해 Oh-Oh-Oh.
좋은 사람인진 모르겠어 미친 듯이 막 끌릴 뿐야.
섣부른 판단일지라도 왠지 사랑일 것만 같아 Oh-Oh-Oh.

애기보살은 타고난 연예기질을 갖고 있었다. 표정은 생생했고 몸짓은 요염했다. 한 소절이 끝나자 랩이 계속됐다. “최고의 사랑일지 미친 사랑의 시작일지”는 알 수 없다고, 알 수 없지만 ‘난 자석처럼 끌려’ 간다고 감미롭게 외칠 때, 애기보살은 정말 자석에 끌려가듯 날아와 이사장의 어깨에 등을 슬쩍 기댔다. 이사장의 얼굴에서 잔주름의 물결이 파상적으로 번져 나갔다.

“사랑을 가능하게 하는 건 본능”이라면서, “우연인지 운명인지 나는 너의 앞에 왔어……”라는 구절에선, 활대처럼 등을 접어서, 이사장의 품 안으로 들어가 짐짓 그와 눈을 마주치고 찡긋, 귀엽게 윙크를 날리기도 했다. 애기보살의 눈빛은 아침햇살을 받은 풀잎처럼 나부끼고 있었다. 그것은 ‘미친 사랑’의 노래였고, ‘미친 사랑’ 자체였다. 나는 이사장의 칼끝을 만났을 때보다 훨씬 더 위태로움을 느꼈다. 가파른 어떤 길을 나는 보았고, 그래서 참을 수 없을 만큼 아슬아슬했다.

* 설 연휴 주간인 1월 31일부터 2월 4일까지 연재를 쉬고
2월 7일부터 다시 이어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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