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사설

라응찬 없는 신한호가 가야 할 길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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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8면

라응찬 신한금융지주 회장이 그제 회장직을 사퇴했다. 52년간의 금융인생을 사실상 마감했다. 구멍가게인 신한금융이 리딩뱅크로 우뚝 서기까지 그의 땀과 눈물은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그는 은행 문턱을 낮추고, 검은 대출사례금을 없애고, 과감하고 신속한 의사결정으로 20여 년간 신한호(號)를 이끌었다. 신한금융의 밝은 면이다. 반면 지난 58일간의 내분 사태는 장기간의 1인 독주체제가 남긴 어두운 이면을 고스란히 드러냈다. 후계구도를 둘러싼 암투, 차명계좌에서 불거진 고소·고발전은 신한을 궁지에 몰아넣었다.

 라 회장이 사퇴했지만 불씨는 남아 있다. 바통을 이어받은 류시열 직무대행 체제가 해야 할 일은 분명하다. 검찰과 금융감독원의 조사 결과에 따라 신상훈 사장과 이백순 은행장의 진퇴부터 조속히 마무리지어야 한다. 조직 추스르기도 시급한 문제다. 두 달 가까운 내홍(內訌) 속에서 신한금융 조직원들은 갈가리 찢겨졌다. 조직이 안정을 찾지 못하면 신한의 표류는 장기화될 수밖에 없다. 무엇보다 비상직무대행 체제가 집중해야 할 것은 새로운 지배구조를 세우는 일이다. 주주들의 뜻을 충분히 반영하면서 재도약의 기틀을 다잡을 수 있는 차기 경영진을 꾸리는 것이 가장 큰 숙제다.

 신한 사태는 지배구조가 불안하면 기업 가치가 얼마나 심각하게 훼손당하는지 생생하게 보여주었다. 신한이 3분기까지 1조9000억원의 수익을 올린 게 신기할 정도다. 앞으로 신한이 안팎의 거센 물살을 제대로 헤쳐나갈 수 있을지 걱정스럽다. 벌써 차기 회장 자리를 둘러싸고 내부에선 줄서기가 횡행하고, 외부 야심가들도 잔뜩 눈독을 들인다는 이야기가 들린다. 신한금융의 운명은 자신의 손에 달렸다. 그동안의 장점을 살리고 28년 전의 초심(初心)으로 돌아간다면 ‘신한의 기적’을 이어갈 수 있을 것이다. 눈앞의 이익에 얽매여 분열을 거듭하면 또 하나의 부실은행으로 전락하고 말 것이다. 신한금융이 우리 금융시장에서 차지하는 위상은 대단하다. 라응찬 없는 신한금융이 어디로 갈지 우리 사회는 걱정스러운 눈빛으로 지켜보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