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린이 비만 막겠다는 식품성분 신호등 표시제 ‘빨간불’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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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0면

21일 오후 4시쯤 서울 강남 터미널 근처의 한 패스트푸드점. 방금 수업을 마친 초등학생 4명이 햄버거·포테이토칩·콜라·치킨을 나눠 먹고 있었다. 황모군은 얼핏 보기에도 비만아였다. 황군에게 주문할 때 열량·지방 함량을 확인했느냐고 물었더니 “처음엔 신기해서 봤지만 요즘은 거의 안 봐요. 숫자(열량 등 영양성분 표시)가 뭘 의미하는지도 잘 모르겠어요”라고 말했다.

 초등학교 1년생인 이진영(서울 도림동)양은 키 1m25㎝, 체중 42㎏으로 비만 판정을 받고 지난달부터 병원치료를 받고 있다. 맞벌이하는 부모를 둬서 주로 할머니 손에 자란 이양은 햄버거·피자·콜라 등 패스트푸드를 하루 평균 두 가지 이상 먹는 등 식생활에 문제가 있었다. 소아비만클리닉에서 좋은 음식과 나쁜 음식에 빨강·초록 스티커를 붙이는 영양교육을 통해 햄버거가 빨강 스티커 음식이라는 것도 배웠다. 이양은 “색깔로 좋은 음식과 나쁜 음식을 가려주니까 알기 쉽다”고 말했다.

 이양처럼 어린 학생들이 칼로리와 ‘% 영양소 비율’ 등을 복잡한 숫자 대신 색깔로 확인하게 되면 좋은 식품과 나쁜 식품을 구분하기 쉬워진다. 그래서 정부는 당·지방·포화지방·나트륨 함량에 따라 어린이 기호식품을 적색·황색·녹색으로 분류하는 ‘식품 신호등 표시제’를 내년 1월 도입하기로 했다. 하지만 어린이들이 자주 먹는 식품이 신호등 표시 대상에서 대거 빠져 실효성 논란이 일고 있다. 특히 처음엔 신호등 표시 의무화가 검토됐으나 ‘권고 사항’으로 후퇴했다. 식품업체가 표시를 하지 않아도 돼 ‘속 빈 강정’ 제도가 될 것이란 지적도 나오고 있다.

 보건복지부와 식품의약품안전청은 28일 “어린이 식품 신호등 표시제 대상에서 제과·제빵·아이스크림·피자·햄버거·라면·떡볶이 등을 제외하고 과자·캔디 등 가공식품에만 적용하기로 했다”(어린이식생활안전관리특별법 시행규칙 입법예고안)고 밝혔다. 복지부 이재용 식품정책과장은 “패스트푸드는 영양성분 의무 표시제를 시행한 지 얼마 안 됐고(올 1월) 떡볶이·튀김 등은 이를 판매하는 업소가 대부분 영세해 영양표시를 할 만한 경제적 여유가 적은 현실을 감안했다”고 말했다.

 이에 따라 대상 식품업체(6300여 곳 추산)에 매출감소 등 큰 부담을 줄 뿐만 아니라 식품가격 상승 요인이지만 어린이 비만 해소엔 큰 효과가 없을 수 있다는 우려가 나오고 있다.

 동국대 일산병원 가정의학과 오상우 교수는 “아이들이 선호하는 햄버거·피자·라면 등을 빼고 이 제도를 실시하는 것은 장기에서 ‘차’와 ‘포’를 뗀 것과 같다”며 “운동량도 부족한 아이들에게 올바른 식생활 습관을 길러주려면 신호등 표시제 대상을 확대해야 한다”고 말했다. 식약청 손문기 식품안전국장은 “패스트푸드·조리식품 등에 대한 신호등 표시도 단계적으로 확대할 계획”이라고 밝혔지만 구체적인 계획은 세워지지 않았다.

 표시 대상의 적정성 논란도 예상된다. 그 예로 식약청은 백색 우유를 신호등 표시 대상에서 제외했다. 권장식품인 우유에도 적색 표시(지방)가 하나 붙을 수 있어서다. 반면 DHA 우유 등 백색 우유에 웰빙성분을 첨가한 우유는 신호등 표시 대상이어서 어린이가 헷갈릴 수 있다는 게 전문가들의 분석이다.

  한림대성심병원 비만클리닉 박경희 교수는 “신호등 표시제가 성과를 거두려면 학교·지역사회에서 지속적인 영양·식생활 교육이 함께 이뤄져야 한다”고 강조했다.

 신호등 표시제는 현재 영국·프랑스에서 자율 실시 중이다. 대상 식품은 샌드위치·반(半)조리식품 등(영국), 콜라 등 탄산음료·유제품·햄류(프랑스) 등으로 우리와 다르다.

박태균 식품의약전문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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