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젊어서 집사람 너무 고생시켜, 완치시키기 전엔 정치 안 합니다”

중앙선데이

입력

지면보기

189호 10면

한광옥 전 대표가 부인 정영자씨와 경기도 가평의 화야산 계곡을 산책하고 있다. [한 전 대표 제공]

“이제 아내에게는 사랑이 무엇보다 필요하다고 느꼈다. 그래서 나는 현대 의술이 끝난 자리에서 이제는 내 사랑으로 아내를 치료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한광옥(68) 전 민주당 대표가 최근 미니홈피에 올린 글이다. 한 전 대표는 폐암 수술을 받고 투병 중인 부인 정영자(67)씨의 간호를 위해 정치활동을 접은 상태다. 오로지 부인의 항암치료를 돕는 데만 열중하고 있다. 벌써 석 달이 넘었다.

한광옥 전 민주당 대표의 思婦曲

민주당 전당대회(10월 3일), 김대중(DJ) 전 대통령 서거 1주기(8월 18일), 7·28 재·보선 같은 큰 행사를 전후해 당 안팎에서 도와 달라는 요청이 쇄도했지만 그는 한결같았다. “아내의 병이 완치될 때까지는 정치를 하지 않겠다”며 완곡히 거절했다.

그는 부인의 간병을 위해 경기도 가평의 한 펜션에 머물다 지난 13일 서울로 돌아왔다. 25일 거처를 다시 수원으로 옮긴다고 한다. 그 준비를 겸해 잠시 집에 돌아온 것이다. “폐암엔 감기가 제일 안 좋은데 가평은 바람이 많기 때문에 좀 더 따뜻한 남쪽으로 옮기려 한다”는 설명이다. 잠깐 짬을 낸 한 전 대표를 지난주 마포의 한 식당에서 만났다.

-여의도에 발길을 뚝 끊어 많은 사람이 궁금해한다.
“7월 16일 아내가 쓰러졌다. 대학병원 세 곳을 옮겨다니며 검사를 했는데 모두 다 폐암이란 판정을 받았다. 아내는 원래 밝고 활달한 성격이었는데 자신이 폐암에 걸렸다는 사실을 믿으려 하지 않더라. 가까스로 설득해 8월 18일 서울대병원에서 수술을 했다. 마침 그날이 DJ 1주기였다. 폐암 2기 말에서 3기로 발전하려는 단계였는데 다행히 수술은 성공적이었다. 수술 후엔 가평에 내려가 있었다.”

-하루 일과를 어떻게 보내나.
“항암치료, 특히 폐암 치료는 아주 힘들다고 한다. 약이 독해 부작용이 심하다. 구토를 하고 몸이 뒤틀리는 고통이 반복되는데 내가 옆에서 함께하는 거다. 폐기능 정상화를 위해 산책을 해야 하기 때문에 하루 2시간씩 같이 산책도 한다. 같이 음악도 듣고 지나간 옛이야기도 나누곤 한다.”

그는 홈피에 남긴 글에서 부인에게서 ‘친구’ ‘님의 향기’라는 노래를 배워 대자연 속에서 함께 합창하기도 한다고 소개했다.

-슬슬 활동할 수도 있지 않을까. 특히 야당 대통합 같은 일을 한 전 대표가 맡아줬으면 하는 목소리도 있다.
“젊어서 아내에게 너무 고생을 많이 시켰다. 민주화 투쟁하면서 감방 가고 야당으로 시련을 겪을 때 아내가 살림을 맡아 뒷바라지하면서 가슴 졸이는 일이 좀 많았나. 그런 고난이 암이라는 병으로 나타난 거다. 나 때문에 생긴 병이다. 힘들다고들 하지만
난 꼭 아내를 완치시킬 거다. 그때까진 정치 안 한다.”

그의 목소리 끝이 가볍게 떨렸다. 그러더니 불쑥 전주북중 3학년 때 전주고 입시장에서의 일화를 회상했다. 사정이 딱한 친구에게 용기를 주고자 ‘앞 뒷자리에 앉게 되면 내가 답안지를 보여주겠다’고 약속했는데 실제로 시험 당일 그 친구의 앞줄에 앉게 됐단다. 그는 답안지를 보여줄 수밖에 없었고 그게 발각돼 명문 전주고를 포기할 수밖에 없었다. 그는 그 길로 서울로 올라와 당시 2차이던 중동고에 입학하게 된다. 명문고 진학의 좌절을 뚝심으로 돌파한 것이다.

이야기를 마친 한 전 대표는 다시 혼잣말처럼 다시 되뇌었다. “집사람, 내가 꼭 완치시킬 겁니다.”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