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시론

대학 개혁에 사학 차별 없어야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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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0면

한국의 고등교육은 사학을 빼놓고 얘기할 수 없다. 현재 4년제 대학의 82%, 전문대학의 90%가 사학이다. 광복 이후 오늘에 이르기까지 이 땅에 사립대학의 헌신이 없었다면 국가의 고급 인재를 육성하는 일 자체가 불가능했을 것이다. 한국의 고등교육 이수 비율이 60개 비교 국가 가운데 5위가 될 수 있는 것도 바로 사학의 공헌임을 부인할 수 없다.

지난해 여당이 주도한 사립학교법 개정안과 정부의 8.31 대학구조개혁 방안을 살펴보면 마치 한국의 사학이 과거사 청산의 대상이나 되는 것처럼 사학을 향해 세운 칼날이 엿보인다. 대학의 생존과 발전을 위해 노심초사하는 사립대학의 총장으로서 마음이 아플 뿐이다.

변화와 혁신을 위해서는 과거와 현재에 대한 깊은 성찰과 균형감각이 있어야 한다. 우리 사회가 '국.공립과 사립'의 분리주의나 '부정.부패.부실의 사학'을 떠올리는 사시(斜視)와 편견에 갇혀 있는 한 결코 그 어떤 교육 개혁 정책도 성공하지 못할 것이다. 적과 동지를 편 가름이나 하듯이 비정상적인 대학 경영의 사례를 들춰내 생존을 위해 몸부림치고 있는 건전한 대학들에 절망감을 던져줘서는 안 된다.

각종 보고서의 통계치를 언급하지 않더라도 한국 고등교육의 경쟁력이 낮다는 것을 누구나 인정한다. 현행 대학 교육이 산업체를 포함한 사회의 요구를 충분히 반영하지 못하고 있다는 것도 잘 안다. 향후 대학 미충원율이 증가해 대학의 위기가 심화할 것이며 대학은 교육 내용과 방법, 그리고 경영 구조 자체를 혁신하지 않을 수 없다는 것도 잘 알고 있다. 그렇지만 정부의 이번 구조 개혁 방안이 과연 국가 교육의 총체를 균형 있게 살핀 결과인지는 다시 생각해 봐야 한다.

무엇보다 정부는 대학교육 구조조정의 우선순위와 효율성을 제고해야 한다. 아무런 특색도 없이 무분별하게 방만 경영을 계속하고 있는 국.공립대학의 구조조정부터 성공시켜야 한다. 국.공립이 효과적으로 구조조정을 하는 데 뒷짐 지고 있을 사립대학은 단 한 군데도 없다. 우리처럼 사학의 비중이 큰 일본이 '도야마 플랜'에서 '국제경쟁력을 갖춘 국립대학의 재건과 책무성 제고'를 기치로 국립대학 전면 법인화를 실현한 이유가 무엇인지 곱씹어 볼 일이다.

오늘날의 미국 대학이 높은 경쟁력을 갖게 된 것은 중앙정부의 과도한 인위적 통제와 관리 때문이 아니다. 국가가 고등교육 시장의 자기 조절 능력을 신뢰하고, 대학의 자율적.창의적 혁신 노력들을 적극적으로 지원해 준 결과다. 1997년 이후 영국이 '고등교육 혁신 기금'으로 대학 혁신을 위한 재정 지원에만 몰두하고 있는 것을 보더라도, 대학 구조조정에서 정부가 어떤 역할에 충실해야 하는지는 자명하다.

이미 한국의 대학들은 자유 시장경제의 원리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는 상황에 처해 있다. 상당수 사립대학이 본격적인 구조조정의 국면에 접어들고 있는 만큼 정부가 더 이상 획일적인 기준을 적용해 이리저리 몰고 다닐 필요가 없다. 대학 구조조정의 목표가 고등교육기관의 양적 축소가 아니라 특성화와 자율 경영을 통해 세계적 교육 경쟁력을 강화하는 일이라면 여기엔 국립과 사립의 차별이 있을 수 없다.

교육인적자원부가 국립대학의 통폐합에 적극적으로 나선 만큼 사립대학의 대학 간 통폐합이나 정원 감축 노력에 대해서도 분명한 행.재정적 지원 대책을 서둘러 내놓아야 한다. 사립대학의 역사적 공헌을 솔직하게 인정하고 그들이 겪고 있는 현실적 고통을 충분히 고려해야 한다. 작금의 대학 구조 개혁 과정에서 결코 사학을 토사구팽(兎死狗烹)의 표적으로 삼는 일은 없어야 할 것이다.

박재규 경남대 총장.전 통일부 장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