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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박사 위주 교수채용 바람직한가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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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9면

최근 미국에서 배출한 박사 중에서 서울대 출신이 차지하는 비중이 2위라는 사실이 보도되면서 아이로니컬하게도 서울대를 비롯한 국내 유수대학 교수들의 과도한 미국 의존도가 사회적 쟁점으로 부각되고 있다. 20년 전부터 제기된 한국 학문의 주체성 문제가 예기치 않은 계기로 드러난 셈이다.

광복 직후 고등교육의 기반이 거의 이뤄지지 않은 상황에서 한국의 대학교수들은 식민지교육을 배경으로 한 사람들로 이뤄졌으며, 미국에서의 재교육으로 경험의 부족을 메웠다. 1960~70년대 전반기에는 국내의 유수 대학 졸업생들로 교수시장이 채워졌는데, 70년대 중반부터 미국에 의존하는 현상이 두드러지기 시작하였다. 이후 한국의 대학이 교수의 공급을 미국의 유수한 대학에 의존하는 시대가 약 30년간 지속되고 있다. 이런 현상의 배후에는 한국의 대학에서 체계적인 박사학위 제도가 70년대 중반에야 도입됐고, 실질적인 박사학위의 생산은 80년대 후반부터였다는 사실이 가로놓여 있다.

한국의 교수시장은 어느 대학이나 자기 대학 출신자들의 비중이 높고, 수도권과 지방이 분절적이라는 특징을 갖는다. 수도권 대학에서는 미국학위 의존도가 매우 높고, 지방대학은 수도권대학의 박사학위 소지자와 자기 대학 출신의 미국학위 소지자들이 섞여 있는데 치열한 경쟁으로 인해 국내 학위 소자자의 입지는 갈수록 좁아지고 있다. 이것은 곧 현재의 대학원 진학 상황에 반영된다. 80년대 전반기 주체적인 학문을 위해 국내에서 공부해야 한다는 흐름이 생겼지만, 이후 이런 적극적 의욕은 교수시장의 충원구조라는 벽에 막혀 약화됐다.

현재 한국의 대학원은 이중구조에 의해 규정된다. 전문학자를 양성하는 대학은 재생산 기반이 약화되고 있는 반면, 다수의 열악한 자원을 가진 대학에서는 재정적 이유로 대학원을 너무 키워 부실한 박사학위가 남발되며, 고학력 실업이 심각하다. 서울대 인문사회계의 경우, 본과 출신의 대학원 진학률이 현저하게 감소되고 있으며, 박사과정이 공동화되는 현상이 발생하고 있다. 자연과학이나 공학의 경우 갈수록 유능한 대학원생을 구하기가 어려워지고 있다. 지방국립대의 경우는 사정이 훨씬 어렵다. 교수의 해외의존도가 높아질수록 이런 현상이 가중되고 있다.

21세기의 국가경쟁력이 창의적 기술과 지식의 발전에 달려 있다면, 당연히 교육정책과 학문정책이 균형을 이루며 발전해야 하는데, 참여정부 들어서 학력차별이나 학벌철폐가 쟁점화되면서 이들 간의 불균형이 심화됐고, 교육정책 또한 대학에서 어떻게 좋은 교육을 할 것인가보다는 우수한 인재를 어떻게 나눌 것인가라는 입시정책에 매달려 있는 형편이다. 최근의 일본이나 중국의 야심찬 학문정책.대학육성정책을 보면 우리의 앞날은 어떻게 될 것인지 걱정하지 않을 수 없다.

그동안 한국의 학문은 한국학술진흥재단과 과학재단의 지원을 바탕으로 하여 눈부시게 발전했지만, 교수나 박사학위 소지자에 대한 연구지원이 중심이지 경쟁력있는 박사학위자를 어떻게 만들어낼 것인가에 관해서는 관심이 적었고, 대학 및 교수 평가 또한 개인의 논문실적 중심이어서 학문 후속 세대의 생산이나 학문적 재생산 기반에 관한 문제는 소홀히 다뤄지거나 제외돼 있다. 대학평가나 교수업적평가는 대학의 위상에 따라 달라져야 하고, 또한 개인적 생산성뿐 아니라 학문의 재생산기반의 확충에 대한 기여도를 중심으로 재편될 필요성이 있다.

이제부터라도 우리는 대학입시정책 중심주의로부터 벗어나 교육정책과 학문정책을 균형있게 발전시킬 방안을 진지하게 모색해야 한다. 이를 위해서는 우선, 현재 한국의 대학원 제도에 대한 총체적 점검이 필요하다. 이의 핵심은 적절한 대학원 규모 조정, 박사학위의 질을 높이기 위한 지원제도 체계화, 그리고 우수한 국내 학위자가 교수시장에서 정당한 평가를 받을 수 있는 방안 모색 등이 될 것이다. 이와 함께 장기적으로 적어도 세계 200위권에 드는 10개 연구대학을 육성할 비전을 세우고 이를 실행할 수 있는 계획을 수립할 필요가 있다. 우리의 실정으로 볼 때, 한국형 연구대학은 수도권의 우수대학과 지방의 주요 거점대학을 기반으로 하면서 이들 소속 대학에 관계없이 연구능력이 뛰어난 학자들이 대학원 운영에 공동으로 참여할 수 있도록 개방적이고 유연한 프로그램을 가져야 할 것이다.

정근식 서울대 교수.사회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