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480>제104話 두더지 人生...발굴40년: 35 무령왕릉 유물 이전 소동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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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1면

무령왕릉 발굴유물을 서울로 옮겨가지 못하게 막은 공주읍민들의 시위는 농성으로 발전했다. 7월 13일 하루 종일 공주읍 전체가 들썩거렸고 농성은 이튿날에도 계속 됐다.

밤에는 공주박물관 안으로 돌멩이가 날아들었고 김영배 관장 앞으로는 입에 담지 못할 협박전화까지 빗발쳤다. 급기야 윤주영 문화공보부 장관이 발굴유물의 정리와 보존처리를 위해 서울로 옮겨야 할 필요성을 역설하고, 앞으로 2∼3년 내 보존 시설을 갖춘 공주박물관 건물을 신축한 후 유물들을 다시 옮겨오겠다고 발표했다. 그러나 주민들은 항의 시위를 그치지 않았다.

조사원들은 테러의 위협까지 느꼈다. 대책회의가 열렸지만 뾰족한 방법이 나올 리 없었다. 발굴 역사상 전례가 없는 일이었다. 어쨌든 시위대 대표와 협상을 위해 허련(許鍊) 문화재관리국장이 급하게 공주로 내려왔다.

무령왕릉 출토유물의 서울 운반이 진퇴양난에 빠져 있을 때 이번엔 엉뚱하게도 언론보도로 인한 말썽이 생겼다. 무령왕의 묘지석(墓誌石) 건탁(乾拓)이 한국일보에 특종 보도된 것이다. 건탁은 비석 등에 새겨진 문자나 석탑의 명문(銘文) 등을 종이에 찍어내는 탁본(拓本)의 한 방법으로, 찍고자 하는 물건 위에 종이를 대고 연필심 등으로 문질러 문자를 복사해 낸다. 탁본 종이를 물로 적시는 일반적인 습탁(濕拓)에 비해 약식이다.

공주박물관이 발칵 뒤집혔다. 서울 문화공보부 출입 기자단은 특정 신문에만 특종기사를 제공했다며 윤주영 장관에게 거칠게 따졌다. 화가 난 윤장관은 특종 기사를 '흘린' 김영배 공주관장을 당장 인사조치하라는 불호령을 내렸다.

공주읍민들의 농성과 협박전화에다 특종 사건까지 겹쳐 김관장은 골머리를 썩였다. 스스로를 마지막 백제인(百濟人)으로 자처하며 남다른 자존심을 지켜온 김관장이 무령왕릉 발굴 덕에 혹독한 홍역을 치른 것이다.

특종 사건의 전말은 이랬다. 당시 문화재위원이던 황수영(黃壽永) 동국대 교수와 지금은 고인이 된 예용해(芮庸海) 한국일보 논설위원은 무령왕릉 출토 유물을 보기 위해 함께 공주박물관으로 내려왔다. 두사람은 김관장의 양해를 얻어 묘지석을 충분히 관찰했다. 묘지석의 내용과 서체에 대해서도 얘기가 오갔다. 이왕이면 묘지석 글자를 좀 더 자세히 보기 위해 갱지(更紙)를 얹어 연필심으로 적당히 문질러 댔다. 갱지에 글자가 새겨졌다. 건탁이었다. 견물생심이라고, 귀한 건탁을 얻은 예용해 논설위원은 곧바로 이를 특종보도했다.

나는 황위원과 김관장은 말을 터놓고 지내는 막역한 사이로 알고 있었다. 하지만 사정이 그리 돌아가다 보니 오가는 말이 고울리 없었다. 김관장의 화풀이는 옆에서 듣기에 민망할 정도였다. 우정이 무엇인지 되새겨 보게 됐다.

결국 김종필 국무총리가 나서서 서울에서 학술적인 연구·분석이 끝나면 공주에 새 박물관을 신축하는대로 이관 전시하겠다는 약속을 했다. 김원룡 단장은 출토유물 가운데 상태가 아주 나쁜 청동신발을 들고 시위대를 만나 직접 설득했다.

"여러분이 보시다시피 이 청동으로 만든 무령왕의 신(靑銅飾履)은 오랜 세월 중병에 걸렸다. 공주에는 이 병을 고칠 시설과 문화재 병원이 없다. 하루빨리 처리하지 않으면 얼마가지 않아 완전히 썩어 형체도 없어질 것이다. 그 책임은 결국 여러분에게 있다. 그러니 유물보존 처리 시설이 있는 서울로 옮기려는 것이다. 보존처리는 원자력연구소에서만 가능한데 막말로 하루아침에 원자력연구소를 공주로 옮겨 올 수 없는 일 아닌가. 유물보존을 위해 서울로 이송할 수밖에 없으니 이해하고 총리와 장관이 새로 공주박물관을 건립한 후 바로 옮겨 전시하겠다고 약속했으니 지켜봐 달라."

결국 김단장의 설득이 먹혔고 유물의 서울 이송이 이뤄졌다. 나중에 들은 얘기지만 당시 공주경찰서장도 사복으로 시위대 사이에 '잠입'해 '유물을 서울로 옮겨야 한다'고 주민들을 설득했다고 한다.

무령왕릉 유물 이송은 7월 9일 오전 발굴이 끝난 지 일주일 만인 15일 일단락됐다. 모두들 몸고생, 마음고생이 심했다. '이제 집으로 돌아가겠구나'하는 안도의 한숨이 절로 나왔다. 아내의 얼굴이 떠올랐다. 마음은 벌써 서울 신혼집에 가 있었다.

정리=신준봉 기자

inform@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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