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쇄]연말·대선 특수도 실종… 4조시장으로 위축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경제 05면

지난 6일 서울 충무로3가 인쇄 골목. 영세 인쇄업체 1천여개가 밀집된 골목은 한산했다. 또 창문에 '세놓습니다'라고 써 붙인 점포도 흔히 볼 수 있었다. 이곳에서 20년간 인쇄업을 했다는 대원문화사의 이상규(41)씨는 "요즘은 일감이 거의 없어 대부분 한나절만 잠깐 기계를 돌린 뒤 놀고 지낸다"고 말했다. 李씨는 이날도 오후에만 기계를 돌렸다고 설명했다. 그는 "지난해 말 이맘 때에는 밤 새워가며 24시간 일하던 날이 더 많았다"며 최근의 어려운 상황과 비교했다.

공신부동산의 이석준(62)씨는 "전에는 자동차·오토바이·인파가 한꺼번에 몰려 골목길이 꽉 차던 곳"이라며 "이대로 가다가는 내년 봄께는 많은 업체가 문을 닫아야 할 판"이라고 말했다. 최근 이곳에서는 '겨울철 일해서 한여름까지 먹고 산다'는 인쇄업계 얘기가 옛말이 됐다.

전통적으로 연말에 수요가 많은 캘린더·카드 물량이 크게 줄고, 선거 인쇄물도 일부를 제외하고는 전혀 특수를 누리지 못하고 있다. 때를 가리지 않고 일감이 많은 큰 업체 몇군데를 빼고는 대부분 고전하고 있는 것이다.

이를 놓고 일부에서는 '영세·난립·덤핑' 업종이라는 오명을 벗지 못하고 있는 인쇄산업이 한계에 다다른 것으로 분석한다.

그러나 또 한편에선 인쇄산업이 국내에서는 쇠퇴업종으로 밀려나고 있지만 해외에선 유망산업으로 각광받고 있다며 육성론을 편다. 세계 최고를 자랑하는 독일보다 2백년이나 앞선 인쇄 역사를 가진 나라의 자존심 차원에서라도 적극 키워야 한다는 목소리가 커지고 있다.

◇컴퓨터 시대에 전반적인 수요는 늘어=대한인쇄정보산업협동조합연합회의 소병식 전무는 인쇄업을 '경기 측정기'라고 지칭한다. 인쇄업은 내수와 직결된 업종이기 때문이다. 경기가 활성화되면 뒤따라 살아나고, 경기가 침체되면 앞서 고전을 면치 못하는 업종이다.

그런데 요즘 인쇄산업은 일부 대기업체를 빼고는 이미 불황이라는 주장이다.

현재 전국의 인쇄업체는 1만8천여개로 추산된다. 그러나 이들이 보유한 시설의 3분의1은 일감이 없어 놀고 있다는 게 협회 측의 얘기다. 이는 최근 침체되고 있는 실물경기, 인력난 등과 관련이 있다고 한다.

기업들이 발주하는 캘린더의 경우 외환위기 이후 매년 20∼30%씩 물량을 줄여나가고 있는 것도 이런 추세와 무관치 않다. 학습지 시장만이 숨통을 틔우고 있다.

국내 인쇄시장은 현재 넉넉하게 잡아도 4조원에 불과할 정도로 영세하다. 이는 일본에서 가장 큰 다이닛폰인쇄사 한 업체의 매출 수준이라는 지적이다. 이렇게 국내 인쇄업이 영세산업으로 머물다 보니 국내 10여개 대학에 설립한 관련 학과도 점차 위축되고 있다. 신구대 인쇄정보미디어과는 한 학년 정원이 1백60명이던 것을 내년부터 40명을 줄여 1백20명만 뽑기로 했다. 컴퓨터 시대를 맞아 인쇄업계의 수요가 그만큼 줄 것으로 전망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같은 비관론에 대한 반론도 만만찮다.

지난달 말 싱가포르에서 열린 동남아지역 7개국 인쇄업체 대표자들 모임인 '아시아 인쇄기술 포럼'에서도 이 문제가 본격 거론됐다. 컴퓨터 시대를 맞아 전통적인 오프세트 인쇄 기계를 줄여야 한다는 일부 목소리 때문이었다. 그러나 이 자리에서는 컴퓨터 출현 이후에도 인쇄업이 크게 위축되지 않았다는 결론이 내려졌다. 사무용 인쇄용지를 제외하고는 큰 변화없이 지속적으로 성장하고 있다는 주장이다. 실제로 한국의 종이·판지 수요를 보면 1998년 외환위기를 제외하고는 매년 꾸준히 증가하는 추세다.

특히 소형 디지털 인쇄기의 발달로 당초 전통적인 인쇄산업이 흔들릴 것으로 봤으나 실제로는 그렇지 않다는 분석이다. 디지털 기계 보급이 미미해 소책자 인쇄 시장만을 조금 잠식했다고 한다. 따라서 국내 인쇄업체들은 이같이 침체된 분위기를 수출 등으로 탈출하려는 노력을 기울이고 있다. 미국·일본 등과 비교하면 동일한 품질의 인쇄물에 대한 가격 경쟁력이 5∼7배나 되기 때문이다. 올해도 캘린더 등을 1억달러 이상 수출할 전망이다.

◇공급 과잉 해결 급선무=국내 인쇄산업의 가장 큰 문제는 공급 과잉이다. 국내시장은 좁은 데다 영세업자가 많다 보니 원가에도 못미치는 덤핑 수주가 범람하고 있다. 따라서 각 업체들은 있는 기계를 놀리느니 차라리 싸게라도 돌려보자며 덤핑수주를 하는 추세라는 지적이다.

또 인쇄업이 중소기업 고유업종에서 풀리면서 영역 침범 논쟁이 끊이지 않고 있다. 관공서·은행·신문사 등에서 자체 인쇄시설을 설치해 영역을 침범하고 있다는 것이다. 진정서를 내는 등 협회 차원에서 끊임없이 문제를 삼고 있다. 더구나 장치산업임에도 불구하고 대기업이 거의 없을 정도로 영세한 실정이다. 직원이 3백명을 넘는 업체는 삼화인쇄·대한교과서·두산동아·교학사 정도가 고작이다. 인력난도 시급히 해결해야 될 문제라는 게 업계의 설명이다.

협회 내 서울조합에서는 인쇄업계의 인력난 해결을 위해 기금을 모을 계획이다. 직업훈련학교 등을 세워 인력을 자체 조달해야 할 만큼 절박한 상황이기 때문이다.

수출시장으로 돌파구를 마련하는 일도 쉽지 않다. 업계에 영어를 할 수 있는 고급 인력이 거의 전무한 실정이라는 얘기다. 중국의 인쇄기술 발달도 수출시장에서 새로운 위협이 되고 있다. 인쇄기계도 대부분 독일·일본 제품을 수입해 쓰고 있다. 국내 기술로 첨단기계를 만들 수는 있지만 시장이 워낙 작아서 선뜻 투자를 못 하기 때문이다. 수입에 의존할 수밖에 없는 산업구조다.

신구대학의 오세웅(인쇄정보미디어과)교수는 "해외에서는 인쇄·출판 분야가 유망 사업인데도 우리는 쇠퇴 산업으로 굳어지고 있다"며 "특히 이 분야는 전통과 기술면에서 세계 어느 나라에도 뒤지지 않기 때문에 첨단 전략산업으로 육성할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김시래 기자

srkim@joongang.co.kr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