兩金이 자꾸 생각나는 까닭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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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6면

고이즈미 준이치로 일본 총리가 평양을 방문하던 날의 일이다. 점심때쯤 국제정치를 전공하는 동료교수에게 들렀더니 오전 내내 기자들의 질문전화에 시달리던 그가 물었다. "일본인 납치 문제는 어떻게 될 것 같아요?" 나는 전공이 문화인류학이지만 왕년에 외무부와 군 정보기관에 잠깐 근무한 경력까지 들먹거리며 자신 있게 대답했다. "삼척동자가 다 아는 뻔한 일이지만 어떻게 인정할 수 있겠수? 범죄조직도 아니고 명색이 국가인데…뒷감당을 어떻게 하려고? 공식적으로는 절대 인정할 수 없지. 일본도 그것까지 기대하지 않을 것이고. 우물우물하며 사람 몇 명 돌려보내겠지 뭐"라고.

그러고는 내친 김에 김대중(金大中)납치사건이 어떻게 처리됐는지 생각해보라고 덧붙였다. 동료 교수도 "글쎄, 아무래도 어렵겠지요?"라고 끄덕였다. 이렇게 소위 일본 전문가 두 사람이 의견일치를 보고 있을 무렵 김정일(金正日)국방위원장은 이미 납치 사실을 '솔직히' 인정하고 있었다. 그날 저녁 나는 동료교수에게 계속 투덜댔다. "평양이 국제감각이 모자라는 것 아냐? 기본이 안돼도 유분수지 어떻게 그럴 수가 있나?"

비록 결과적으로 틀리긴 했지만 그래도 누가 내기를 하자고 했다면 나는 기꺼이 응했을 것이다. 나름대로 근거를 갖고 판단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언제나 내기에 응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지난주 수요일 오후 '국립공원 속의 대학'에 근무하는 즐거움을 만끽하고자 동료 교수들과 북한산에 올랐다.내려오는 도중 어느 분이 후보 단일화 이야기를 꺼냈다. 누가 단일화 후보가 될 것인지 내기를 해보면 어떠냐는 이야기도 나왔다. 그런데 조금 이야기해보니 도무지 내기가 되지 않는다.

후보 단일화를 한다는 두 후보의 경력이나 면면을 볼 때 어떻게 그 두 사람이 단일화를 한다는 것인지, 왜 두 후보의 단일화가 필요한지, 단일화를 할 경우 누가 단일 후보로 더 적합한 것인지, 도무지 무엇을 근거로 어떻게 판단해야 할지 막연하기 때문이었다.

어제 아침에는 아내·처남과 함께 차를 타고 가는데, 처남이 후보 단일화 이야기를 꺼냈다. 후보 단일화가 이뤄질 것인지 내기를 하자는 것이었다. 내기는 또 성립하지 않았다. 모두 같은 쪽에 걸려고 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후보 단일화를 정말로 간절히 바란 적도 있었다. 박정희 대통령 시절은 차치하고, 소위 '서울의 봄' 당시 얼마나 많은 사람이 군부의 재등장을 우려하면서 양金이 힘을 합치기를 염원했던가? 그러한 기대를 저버리고 각기 대통령이 되기를 노리다가 한 사람은 가택연금을 당하고, 또 한 사람은 체포돼 내란음모죄로 사형까지 선고받았다. 민주화의 꿈은 아득히 멀어지고 수많은 젊은이가 희생됐다.

그러한 희생과 아픔을 토대로 1987년 6월항쟁이 있었고 6·29 선언이 나왔다. 대통령을 직선으로 뽑게 되는 감격이란…. 6월항쟁에 참여했던 수많은 시민들이 후보단일화를 얼마나 염원했던가? 그러나 그리도 민주화를 외치던 양金 사이에 후보 단일화는 실현되지 않았고, 결국 노태우(盧泰愚)후보와 3金이 겨루게 됐다.

마침 미국 유학 중이었지만 신문을 보고 있었으므로, 양金의 과거 행적을 생각할 때 단일화의 실패와 노태우 후보의 승리는 어느 정도 예상할 수 있었다. 나는 노태우 후보가 승리할 것이라 했으나 아내는 "그래도" 양金 중의 하나가 되지 않겠느냐는 의견을 굽히지 않았다.

결국 내기를 하게 됐다. '일어날 것 같은 일'과 '일어났으면 하는 일' 사이의 내기였다. 아내는 '일어났으면 하는 일'에 걸었고, 나는 내심으로는 내기에 지기를 바라면서 반대 쪽에 걸었다. 그리고는 씁쓸하게 이겼다.

그러한 내기의 기억을 떠올리며 최근의 후보 단일화 논의를 지켜본다. 민주화에 대한 수많은 국민들의 염원과 역사적 당위성에도 불구하고 실현되지 않았던 후보 단일화가 이번에는 이뤄질까? 특정 후보의 당선 저지가 민주화에 대한 염원보다도 더 큰 요인으로 작용할 수 있을까? 여론조사라는 방법 이외에는 후보 선정이 불가능한가? 역시 내기가 되기는 어렵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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