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상천외한 시나리오에 할리우드 눈독 美에 심은 '충무로의 영광'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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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5면

줄리아 로버츠가 '조폭 마누라'의 신은경이 되고, 카메론 디아즈가 '엽기적인 그녀'의 전지현을 연기한다?

조만간 가시화될 얘기다. 한국의 코미디 영화가 미국판으로 다시 만들어지기 위해 줄줄이 팔려나가고 있다. 그리고 수십만 달러를 주고 리메이크(Remake) 판권을 사가는 할리우드의 영화 제작사들은 "판권을 넘겨주면 최정상급 스타 캐스팅을 하겠다"고 다짐하고 있기 때문이다.

지난 4일 이탈리아 밀라노 필름 마켓(MIFED)에선 할리우드의 큰손인 워너 브러더스·미라맥스·유니버설 등이 코미디 영화 '가문의 영광'(제작 태원엔터테인먼트)리메이크 판권을 사겠다고 한꺼번에 덤벼들었다. 태원엔터테인먼트는 50만 달러(약 6억원)에 전세계 수익의 3%를 옵션으로 제시한 워너에 판권을 넘기기로 했다. 돈도 돈이지만 워너 측이 내숭녀 진경(김정은)의 미국 버전으로 확실한 '톱스타'의 캐스팅을 약속했기 때문이다.

지난해의 히트작으로는 '조폭 마누라'(미라맥스·95만달러)를 필두로 '엽기적인 그녀'(드림웍스 SKG·75만달러), '달마야 놀자'(MGM·30만달러)등이 할리우드 제작사에 판권을 팔았다.

한국영화를, 그것도 코미디를 영화 만들기의 선수들이 앞다퉈 다시 만들려는 이유는 뭘까. 가장 큰 이유는 기발한 소재다. '달마야 놀자'를 만든 씨네월드의 정승혜 이사는 "자기들의 고전이나 유럽영화를 리메이크하는 데 지친 할리우드가 한국영화라는 새로운 시장으로 눈을 돌린 것"이라고 말했다.

아내가 조폭의 우두머리라든가, 조폭들이 절로 피신해 스님들과 대결을 벌인다든가 하는 기상천외한 설정에 할리우드 제작자들이 눈을 동그랗게 뜬다는 것이다. 특히 여성 캐릭터가 생생하게 부각된다는 점도 호소력을 지닌다. 툭 하면 남자친구에게 펀치를 날리는 엽기녀('엽기적인 그녀'), 얌전한 척 내숭떨다 순간적으로 걸쭉한 호남 사투리를 쓰며 돌변하는 진경('가문의 영광')처럼.

상대적으로 저렴한 가격에 질 좋은 시나리오를 살 수 있다는 것도 그들에겐 큰 이점이다. 예컨데 일본 공포영화를 리메이크한 '링'은 지난달 개봉해 3주 만에 약 6천만달러(약 7백20억원)의 수익을 올렸다. '링'의 시나리오에 제작사가 지불한 돈은 불과 1백만달러(12억원).

영화로 만들어져 이미 히트한 작품이기에 성공 가능성이 크다는 점도 매력이다. 할리우드 메이저 제작사에는 발탁을 기대하는 시나리오가 줄을 서 있다. 그러나 이미 완성된 영화, 한국에서 성공한 영화가 이들 시나리오보다 경쟁력 있는 것은 당연하다.

하지만 흥분하기엔 이르다.'엽기적인 그녀'의 제작사 신씨네의 이용혁 이사는 "가령 신씨네의 이름이 크레디트(credit:영화 말미에 관계자들을 명기하는 자막)에 오르느냐 하는 문제 등 세부적으로 조율해야 할 사항이 많다"고 말했다.

제작사 이름이 크레디트에 들어가는 건 기획 과정에 한국이 참여했다는 의미다. 따라서 향후 할리우드와 공동제작을 할 수 있는 발판이 될 수도 있어 소홀히 넘길 수 없는 부분이다. '가문의 영광'도 정태원 대표의 이름을 크레디트에 '공동 프로듀서(co-producer)로 표기하는 문제를 놓고 워너와 막판 진통을 벌인 끝에 관철했다.

기선민 기자

murphy@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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