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아침책편지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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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7면

아버지는 한라산 기슭의 가족 묘지에 안장되었다. 사촌들과 함께 어렵사리 마련한 그 묘역에는 백부가 먼저 들어와 누워 있었는데, 그 옆으로 한 자리 떼어놓고 두번째 봉분이 생긴 것이다. 나는 아버지의 봉분으로부터 발걸음으로 거리를 재어 장차 내가 묻힐 자리에 서 보았다. 그러자 내 눈길이 자연스럽게 대학 1학년짜리 큰아들 쪽으로 가는 게 아닌가! 나는 야릇한 감회에 훅, 하고 웃음을 날렸다.

『지상에 숟가락 하나』(현기영 장편소설, 실천문학사)

작가의 유년을 고스란히 되살려낸 이 소설을 두고 평론가 황광수 씨는 "한 사람의 성장기가 이토록 풍요롭고 아름다울 수 있을까!"라고 감탄하고 있군요. 나는 유년, 그 부서질 듯 여린 한때를 여태 보듬어 안고 있는 기억의 신비로움에 더욱 감탄했습니다. 그리고 지상의 아버지들치고 아들을 바라보는 '눈길'에서 자유로울 수 있는 사람이 누가 있겠습니까.

김석희<번역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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