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지율에 목 매단 정치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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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7면

'여론조사의 대명사' 갤럽을 창시한 조지 갤럽은 "여론조사는 여론을 가늠하는 한 도구에 불과하다. 조사결과는 사람들의 견해가 대충 그렇다는 것일 뿐 그 밖의 어떤 해석도 난센스다"라고 잘라 말했다. 조사결과에 대한 맹신(盲信)이나 자의적 해석에 대한 일종의 경고였다.

여기서 갤럽이 말한 '여론'은 '퍼블릭 오피니언(public opinion)', 즉 공론(公論)이다. 군중의 덧없는 인기, 즉 중론(衆論)과는 구분된다. 공중(公衆)의 의론(議論)이 여론(輿論)이며 이는 어떤 문제를 놓고 사회적 담론과정을 거치면서 형성된다고 한다. 이 기준으로 볼 때 우리 현실에서 제대로 된 여론조사는 과연 얼마나 될까.

공중도, 의론도, 사회적 담론도 없이 덥석 조사부터 하는 군중의 인기투표가 우리의 여론조사라고 해도 크게 틀린 말은 아니다. 때문에 무응답자가 너무 많고, 조사기관 간에 편차가 크고, 바람의 방향에 따라 지지율이 널을 뛰기도 한다.

여론조사의 원시적인 형태가 '지푸라기 폴(straw poll)'이다. 지푸라기를 던져 올려 바람을 타고 어느쪽으로 떨어지는가에 따라 판세를 가린다는 비유에서 생긴 말이다. '노풍(盧風)''정풍(鄭風)'의 덧없는 실체들이 바로 그 짝이다.

그럼에도 후보 진영들은 이 지지율 조사에 죽자사자 매달리고 지지율을 끌어올리는 데 도움이 된다면 어떤 무리도 서슴지 않는다. 조사방법이나 과정이야 어떻든 근년의 각종 지지율 조사들이 당락을 거의 그대로 맞힌 결과로 보면 후보들이 '지지율의 노예'가 되는 것도 무리는 아니다. 그래서 지지율이 오르는 쪽으로 정치철새들이 무리지어 날고, 지지율이 주춤하면 언제 그랬더냐는 듯 날개를 접는다.

그러나 이런 지지율 위주의 정치가 가져오는 국가적 해악은 엄청나다. 포퓰리즘(인기영합주의)과 중우(衆愚)정치의 악순환이 그 첫째다. 모든 것을 여론에 물어보고 오로지 당선만을 위한 선거운동에 몰입한다. 비전이나 정책개발은 뒷전이고 점퍼 차림으로 시장바닥을 다투어 누빈다. 국민 대중을 이끄는 지도자(leader)가 아니고 여론과 인기를 좇는 추종자(follower)로 스스로를 전락시킨다.

경마식 지지율 다툼과 흥미 위주의 판세분석들은 지지 성향을 현상 위주로 고착화한다는 것이 그 둘째다. 강한 지역정서나 대결구도가 지배하는 정치상황일수록 이를 더욱 부추긴다. 또 채 검증이 안된 후보라도 여론조사에서 주요경쟁자로 명단을 올려놓으면 일정 '지분(持分)'의 지지율을 '무임승차'로 누린다. 의도적인 반복조사로 '띄우기'도 가능하다.

지역정서나 '바람'에 좌우되면 후보를 고르는 안목과 선택 여지는 좁아진다. 근년 들어 엄청난 기권율은 선택의 자유를 박탈당한 유권자들의 소리 없는 '반란'일 수도 있다. 이는 조사방법이나 기법 등 '여론조사의 과학'이전의 문제다.

갤럽은 역대 미국 대통령선거에서 딱 한번 1948년 해리 트루먼의 당선을 잘못 짚었다. 미주리 시골뜨기 트루먼은 가난해 대학을 못가고 시력이 나빠 육군사관학교에도 못갔다. 그가 대통령에 취임하자 뉴욕 타임스는 "경험도, 지식도, 명성도 없는 자가… "하고 개탄했다. 그런 그가 일본에 원폭 투하, 한국전 참전, 맥아더 사령관 해임 같은 세기적 결단을 내렸다. 처칠이 처음에 사람을 잘못 봤었다고 트루먼에게 4년 후 고백할 정도였다. 지지율에 따른 줄서기나 세 불리기에 앞서 도덕성과 '그릇', 판단력 등 인물 검증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침이 없다.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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