운동권 출신 줄줄이 낙선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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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5면

8·8 재·보선은 반독재 투쟁경력이 화려한 이른바 '민주화 운동세력'에 시련을 안겨줬다.

민주당 김근태·한나라당 이부영(富榮)의원과 함께 운동권 1세대의 트로이카이자 마지막 재야인사로 불렸던 장기표(張琪杓·57·영등포을)후보가 고배를 마셨다. 1992년 민중당 후보로 국회 진입을 시도한 이래 이번이 네번째. 모두 실패했다.

여러 차례 독자적인 진보정당을 실험하다 결국 민주당에 들어와 출마했지만 무명이나 다름없던 한나라당 후보에게 무너졌다.

지명도는 높았지만 민주당을 외면한 민심의 벽은 높았다. 張후보와 함께 민중당을 창당했던 이우재(佑宰·금천)후보는 한나라당 소속으로 출마해 가볍게 금배지를 따냈다.

현 정부 노사정위원회의 사무처장을 지낸 이목희(穆熙·49·금천)후보도 80~90년대 인천지역 노동운동권의 대부였다. 김근태 의원의 지원으로 민주당에서 첫 출마했지만 같은 재야운동권 출신인 이우재 후보에게 패배했다.

역시 종로에서 민주당 소속으로 출마한 유인태(寅泰·54)전 의원은 70년대 초 '민청학련'사건으로 사형선고를 받았었다. 1995년 당시 통합 민주당에서 김대중(金大中)대통령의 국민회의가 갈라질 때 노무현(武鉉)후보·김원기(金元基)의원 등과 함께 민주당에 잔류한 이른바 '통추(국민통합 추진회의)'출신 정치인이다. 후보의 개혁색깔을 대표하는 상징적 인사 중의 한명이었다. 그의 실패를 곧 노무현 후보의 세 불리기의 실패로 해석하는 사람도 있다.

민주당 공천에서 탈락해 무소속으로 출마한 함운경(咸雲炅·37·군산)후보는 80년대의 대표적인 '386운동가' 중의 한명이다. 咸후보는 80년대 초 '서울대 삼민투 위원장'으로 학생운동을 주도했다. 국가보안법·집시법 등으로 다섯 차례 수형생활을 했다.

선거전 초반만 해도 민주당 강봉균(康奉均)후보보다 여론지지도에서 많이 앞선 것으로 파악됐으나 결국 민주당 조직표를 감당하지 못했다.

민주화운동 세력의 실패는 유권자들이 더 이상 이들의 이미지를 선호하지 않는다는 현실을 반영하는 것일 수 있다. 그러나 한나라당 운동권 출신들은 당선된 경우도 있어 적어도 현재로선 민주당 간판으로 선거를 치르기 어렵다는 것을 보여준다.

전영기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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