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민단체, 옛 덕수궁터 美아파트 건립 반대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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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1면

서울 정동의 옛 덕수궁 터에 미국 대사관과 대사관 직원용 8층 아파트를 건립하는 문제를 놓고 미 대사관과 시민단체간에 벌어진 줄다리기가 어느새 3개월 째를 맞고 있다.

시민단체들의 조직적 반대 압박에 대사관측은 면담까지 약속을 하고 있으나 건립계획은 철회할 용의가 없다는 태도. 이 가운데 서울시와 정부는 아직도 모호한 입장이어서 시민단체들의 원성을 사고 있다.

◇시민단체들의 반대운동=치열한 공방전의 시작은 지난 5월 대사관 측이 현재 사용 중인 세종로 건물이 좁고 낡았다는 이유로 덕수궁 터에 연면적 5만4천여평(지상 15층·지하 2층)의 대사관 건물과 함께 54가구 규모의 직원 숙소용 8층 아파트 건립 계획을 세우고 건설교통부 측에 협조를 요청했다는 사실이 알려지면서 부터다.

이같은 사실이 전해지자 문화개혁시민연대·겨레문화답사연합 등 문화운동단체들이 먼저 앞장 서 지난 달 19일 "덕수궁 터를 비롯한 정동 일대는 우리 역사와 문화가 살아 숨쉬는 소중한 문화 유산"이라며 "이런 지역에 고층 건물을 짓겠다는 미 대사관의 계획은 '문화적 야만 행위'"라는 입장을 발표했다.

이후 경제정의실천시민연합·한국청년연합회(KYC)·녹색연합·한국건축역사학회 등 30여개 단체들이 속속 반대 활동에 동참의사를 밝히며 지난 달 26일 '덕수궁 미대사관·아파트 신축반대 시민모임(공동대표 강내희)'을 공식 출범시켰다.

시민모임은 매일 덕수궁 앞에서'릴레이 1인 시위'를 진행하고 미 대사관의 계획이 ▶문화재 보전지역에서 1㎞ 이내 지역에 고층 건물의 건설을 규제하고 있는 서울시 지침에 위배된다는 점▶20가구 이상의 건물 건축시 주차장과 놀이터 등 부대시설을 반드시 포함해야 하며 공개청약을 통해 분양토록 정하고 있는 주택건설촉진법 시행령의 기준도 충족하지 못한다는 점 등을 시민들에게 꾸준히 알려왔다.

또 온·오프라인 서명운동을 통해 3만여명의 시민들로부터 동참의사를 받아내는 한편 서울시청과 관계 당국을 상대로는 이번 기회에 정동 일대를 문화지구로 지정해 미국 대사관의 신축 계획을 전면 백지화하도록 압박하는 활동을 펼쳐왔다.

시민모임은 지난 16일에는 덕수궁 앞에서 집회를 열고 "이달 초 이명박 시장과 토머스 허버드 미국대사 앞으로 공식 면담을 요구하는 공문을 발송했으며 허버드 대사로부턴 구두로 면담을 약속 받았다"고 밝혔다.

◇미 대사관 측 반응과 전망= 미 대사관측은 시민단체들과의 면담을 약속하긴 했지만 "아직은 건물 신축계획을 취소할 의사가 없다" 는 뜻을 명확히 하고 있다.

대사관 측은 지난 4일 신축 공사의 설계를 맡은 건축가 마이클 그레이브를 초청, 기자회견까지 열고 시민단체들이 주장하고 있는 환경·문화재 훼손 가능성을 일축했다.

이날 기자회견에서 대사관 측은 "새롭게 지어질 대사관과 아파트는 주변 환경과 완벽하게 조화되도록 설계했다"며 "서울시와 협의 후 혹시 있을지 모를 덕수궁 터의 문화재 발굴작업을 선행하고서라도 공사를 추진할 것"이라고 완강한 입장을 고수했다.

한편 건교부는 지난 5일 주택건설촉진법 개정안을 발표하면서 "이번 개정안엔 외국 외교시설의 건축에 대한 특례 부여 조항이 없다"며 "하지만 미국 대사관 측의 요구로 이를 고려했던 것은 사실"이라고 밝혀 시민단체들의 원성을 사고 있다.

남궁욱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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