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386>제102話고쟁이를란제리로 : 35. 50년 知己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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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9면

내 집무실에는 풍경화 한 점이 걸려 있다.코오롱 그룹 이동찬(東燦·80) 명예회장이 1995년 4월에 그린 유화다.

지난해 한국프레스센터에서 팔순 기념 전시회를 마친 회장이 특별히 나를 불러 선물한 것이다. 나는 13호 크기의 이 작품을 각별한 애정을 가지고 소장 중이다.

2000년 봄 회장은 나에게 불쑥 이런 제안을 한 적이 있다.

"그림을 한번 배워보지 않겠습니까?"

"제가 어떻게 그림을…."

나는 자의반 타의반으로 그림 공부를 시작했다. 코오롱 그룹 회장실 옆에 있는 화실에서 하루에도 몇시간씩 데생 연습을 했다. 처음에는 제법 진지했다. 회장의 추천으로 미대 교수 지도까지 받았으니까.

그러나 오래 가지는 못했다. 나이 탓인지 허리가 아프고 집중력이 떨어졌다. 설렘 속에 시작한 일이었지만 몇달 만에 그만뒀다.

회장과 교분을 쌓은 것은 50년대부터다. 처음에는 내가 스타킹 사업에 진출하면서 업무상 거래를 했다. 나는 스타킹의 주원료로 나일론 실을 썼다. 국내에서는 나일론 실이 생산되지 않았다. 어쩔 수 없이 일본 도레이 나일론을 사용했다. 이때 회장이 운영하던 삼경물산을 통해 나일론 실을 수입했던 것이다.

63년 회장은 한국나일론(현 코오롱)을 세워 나일론 실을 직접 생산하기 시작했다. 나는 즉시 거래처를 한국나일론으로 바꿨다.

사업을 하면서 50여년 동안 쌓인 교분은 한결같았다. 이제는 사업의 동반자란 표현만으론 부족하다.가족 같은 사이로 발전했다. 부부 동반으로 골프를 종종 치기도 한다. 해외에서 만나 가족끼리 시간을 같이 보내기도 한다.

나는 골프를, 회장은 그림을 유독 좋아한다.회장이 붓을 잡은 것은 20년도 넘는다. 코오롱 그룹 회장실 옆에 화실을 꾸며 놓고 있을 정도였다. 그는 매주 목요일이면 어김없이 이 화실에 들렀다. 대여섯 평 되는 이 공간에 한번 들어가면 대여섯 시간이 지나야 나왔다.

화실에서의 무아경(無我境)은 어느 누구도 방해할 수 없었다. 나는 그 '기밀'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그 시간에는 절대로 연락을 하지 않았다.

회장의 그림 솜씨는 알아주는 수준이다.코오롱 회사 달력에 나온 여섯 폭의 그림을 직접 그리기까지 했다. 요즘에도 홍익대 류재우 교수가 꾸준히 개인 지도를 한다고 들었다.

회장이 그린 작품은 1백여점에 이른다. 전시회도 그동안 두번 했다. 90년대 초반에 한번 했고, 지난해 팔순 기념으로 두번째 전시회를 열었다.

그는 특히 풍경화를 많이 그리는 편이다. 나에게 선물한 그림도 골프장이 배경이다. 잔디와 나무와 하늘이 서로 평온하게 어울린 목가풍이다.

그는 늘 부드러운 표정으로 날 대한다. 원래 성품이 온화하다. 그룹 회장이라면 근엄한 면이 없지 않을 것이지만 그는 소탈하고 낭만적이다. 주말이면 지인들과 산에 오르고 낚시와 바둑을 즐기는 범인이다.

나는 회장과의 인연 때문에 코오롱이 운영하는 골프장 우정힐스컨트리클럽의 운영위원으로 참여하고 있다. 지금의 비비안 사옥도 코오롱건설이 지은 것이다.

70년대 서울 서빙고동 현 위치에 1천2백80평을 사둔 게 사옥 터가 됐다. 당시 서울신탁은행 계열사인 한신부동산에서 불하받은 땅이었다.근처에 미군부대밖에 없을 때였지만 서울 중심이어서 활용가치가 높을 것으로 판단해 사둔 것인데, 오늘날 사옥이 들어선 것이다.

"회장님. 우리 사옥을 지어주시겠습니까."

나는 공개입찰을 할까도 했지만 회장에게 맡기는 게 낫겠다고 생각했다. 그만큼 믿는 사이였기 때문이다.코오롱건설이 2년 동안 공사를 해 96년 7백여평의 부지에 10층짜리 사옥이 들어섰다.

정리=이종태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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