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행복한책읽기] 권력, 그 '씁쓸한 코미디'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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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41면

□ 정치 헌금 '다섯장'=5공 당시 헌금 통고를 받은 건설업계 K회장이 준비한 뭉칫돈을 싸들고 청와대로 달려갔다. 독대로 만난 전두환 대통령이 얼마 넣었느냐고 대뜸 물었다. "석장"이라고 했다. "채우시오"하는 말이 되돌아왔다. 나오는 길에 경호실장에게 물었더니 "다섯장"이라고 귀띔했다. 허겁지겁 두 장을 채워 접수시켰다. 이런 뒷얘기를 이 책의 저자인 손광식(65·전 경향신문 편집국장)에게 털어놓던 K회장의 뒷말이 여운을 남긴다. "더 큰거 한장을 요구하지 않은 것 만해도 다행이야" 작은거 한장의 단위가 궁금하시다고? 그건 10억원을 말한다.(2백28쪽)

□ 여가수의 "나도 국모(國母)"=가수 K양이 박정희 대통령 시절 궁정동 밤 행사에 다녀온 며칠 뒤였다. 하필 그가 음주운전으로 걸렸다. 단속 경관과 실랑이 끝에 K양이 빽, 고함을 쳤다. "야, 너 국모한테 어찌 감히?" 저자는 제왕적 대통령의 원조로 박통을 꼽지만, 채홍사에게 발탁됐던 여인도 이 정도 위세였다. 한국의 권력 중독을 상징하는 에피소드지만, 어쨌거나 K양은 운이 좋았다. 청와대 안테나에 그 발언이 잡혔지만, 취중 객기 쪽으로 몰자는 결정을 내렸기 때문이다. 그녀의 가요계 은퇴를 부를 수 있는 사건은 그렇게 조용히 마감됐다.(2백11쪽)

『한국의 이너서클』을 읽다보면 곳곳에서 박장대소를 하지 않을 수 없다. 30년 기자생활을 했던 기자에게 내로라하는 파워 엘리트들이 은밀하게 들려줬던 비화들이 공개되기 때문이다. 상당수는 실명(實名)이다. 어깨에 힘을 준 공식적 권력, 그것의 컴컴한 뒤통수를 훑어 내리는 재미는 기대치를 훌쩍 뛰어넘는다. 문제는 박장대소의 뒤끝이다. 영 개운치 않다. "권부 사람이라고 시정의 사람과 다를 게 없네?" 하는 확인 때문이다.

거기까지가 전부라면, 그래서 정치 허무주의를 부추기는 책에 불과하다면 이 책은 킬링타임용이다. 그러나 이 책은 간단치 않다. 이유는 두가지. 우선은 언젠가 들어봤던 이야기들, 그리고 얼추 가늠은 해왔던 에피소드들을 한데 모아놓고 보니 '파워 엘리트들의 이야기로 읽는 현대사'로 유감없다. 저자의 의중은 여기서 한걸음 더 나간다. 이런 작업을 통한 권력의 진화, 권력의 개량을 겨냥하고 있기 때문이다.

"책을 엮으며 나는 과연 권력이란 무엇인가를 늘 염두에 뒀다. 권력은 명분을 내세우지만, 힘을 유지하는 내면세계와 일상이란 때로는 유치하기도 하고 비도덕적이며 비윤리적이기까지 하다. 고금동서를 통해 권력의 이너서클은 그 본질 면에서 변화가 없다는 생각도 든다. 그렇다고 권력을 매도할 수는 없다. 다만 그 내밀하고 왜곡된 틀이 공개되고 비판됨으로써 권력 자체의 진화가 있을 것이란 점은 보장할 수 있다."(머리말 '30년 기자 파일을 공개하며')

등장 인물들은 박정희, 최규하, 전두환, 노태우, 김영삼, 김대중 등 역대 대통령들을 포함하고 있고, 여기에 이후락, 김재규, 차지철, 김계원,박철언, 이종찬, 최창윤, 허삼수·허화평·허문도 등 3허(許)씨 등 실세들을 포함한다. 역대 총리·부총리들인 김종필, 남덕우, 신현확씨 등을 비롯해 소통령 김현철 등도 나온다. 김일성, 김정일 등 북한 이너서클 인사들도 일부 등장한다. 이순자, 김옥숙 여사 등 권부의 여인들도 빠질 수 없다. 정·관계 고위인사로는 김학렬 전 경제기획원 장관, 김재익 청와대 수석, 이석채 전 정통, 김기춘 전 법무 등과 함께 A, B 등으로 나오는 무수한 익명인물들도 등장한다. 현대그룹 정주영 회장을 포함해 건설사 회장 K등 경제계 사람들, 주요 신문사 발행인과 편집국장들도 수두룩하다.

웬만한 작가라면 책 속의 수백개 에피소드에서 작품 여러개를 구상해낼 수도 있겠다 싶은게 『한국의 이너서클』인데, 그 중 압권은 'O수산청장의 물개 진상 사건'이다. 예전 거의 관행화됐던 관료사회 내부의 뇌물 수수 촌극을 드러내준다. 스토리는 이렇다. 70년대 당시 수산청장 O씨가 미국 여행 직후 당시 총리 정일권에게 귀한 선물을 준비했다. 정력에 좋다는 물개였다. 그걸 산채로 특송하기로 했다. 한국으로 가는 어업지도선 한척을 구해 개조한 선원 욕실에 물개를 넣어 인천까지 싣고왔다.

호기심에 가득찬 표정의 정일권이 지도선 시찰 명목으로 인천으로 달려왔다. 시찰 중 정일권이 슬쩍 물었다. "내것 어디있지?" 욕실문을 열었더니 웬걸, 물개의 물건이 칼로 도려진 채 죽어있었다. 수송 작전 중에 사고가 난 것이다.' 복마전 관가'를 보여주는 이 사건의 주인공 물개는 현재 부산 해양박물관에 전시 중이라고 저자는 밝히고 있다. 물개 사건이 코믹하다면 N차관보의 얘기는 '관가 부패의 일상'을 보여준다. 한·일협정 관계로 막 비행기를 타려는 그에게 인사첩보가 날아들었다. "모두들 승진차 뛰고 있다."

하늘이 노래진 N차관보는 급히 자기 부인에게 손댈 곳 다섯개 기관을 말해준 뒤 비행기에 올랐다. 청와대, 여당, 남산(정보부), 총리실, 장관실. 이곳에 금맥과 인맥을 총동원하는 전쟁 끝에 그는 차관 승진을 기어코 따냈다. 충격적인 것은 부패의 연결고리 실상을 박통도 알고 있었다는 점이다. 정권말기 거의 자포자기 심정을 드러내는 대목도 비친다. 다음은 박통이 한 경호책임자와 나눈 대화다. "너, 돈 많이 벌었지?" "각하 모시느라 돈 못 모았습니다." "임마, 내 다 알아. 바깥에서 많이들 해먹고 있잖아. 너도 내가 살아 있을 때 앞가림 해둬"(2백15쪽)

여기까지 말하면 이 책의 주제가 '정치인과 부패'에 국한된 것처럼 비칠 것이다. 사실이다. 그러나 이 책은 이 사회 권력의 작동 메커니즘, 그리고 파워게임을 벌이는 권권(權權), 유착과 긴장관계의 권경(權經), 길항관계의 권언(權言)의 방정식을 들여다보게 해주는 정보들도 적지않다. 리얼리티를 살리기 위해 옴니버스 식으로 서술한 방식도 눈여겨 볼 만하다. 등장인물이 저자에게 말했던 구어체의 말을 거의 그대로 살린 것이다.

문제는 있다. 사안에 따라 신빙성이 떨어지는 대목이 눈에 뜨인다는 점이다. 당시의 상황에 대한 친절한 설명이 부족하다 싶은 대목도 없지않다. 인터넷신문 프레시안(www.pressian.co.kr) 연재물을 책으로 담을 때 보완작업이 부족했다는 지적이다. 그러나 책에 노출되는 정보들을 통해 오늘은 물론 내일도 거듭될 여야 격돌, 정치와 재벌 사이의 갈등,보혁 충돌, 시장경제와 관치경제 사이의 긴장 등을 함께 읽어낼 참고항목으로 활용할 가치는 충분하다.

저자는 서울 태생. 64년 대한일보에서 기자 입문을 했고, 경향신문에서 평기자·경제부장·편집국장·주필 등을 거쳤다. 문화일보에서 주필과 사장을 역임했으며, 현재는 삼성경제연구소 고문으로 활동 중이다.

조우석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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