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사설

기억조차 하고 싶지 않은 2004년 정치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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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2면

올 한 해 내내 정치판은 요동쳤다. 그 후유증은 너무나 커서 남아시아의 지진해일 피해 못지않은 깊은 상처를 국민의 마음에 남겼다. 발전을 향한 과도기적 진통으로 치부하기엔 상대방에 대한 증오와 미움이 판쳤다. 이를 수습하고 극복하지 못한다면 내년에도 국민의 궁핍한 삶은 뒷전으로 밀려나고 정치 투쟁과 이념 갈등이 또다시 우리 사회를 황폐화시킬 것이다.

연초 "경제에 올인하겠다"던 대통령의 다짐은 대통령에 의해 물거품이 됐다. 17대 총선에서 다수 의석을 확보해야 한다는 강박관념이 다른 모든 국정과제를 뒤덮었다. 열린우리당에 대한 압도적 지지를 호소한 대통령의 발언은 야당의 반발을 불렀고, 중앙선관위는 선거 중립 의무 위반이라는 판단을 내렸다. 이에 야당은 극한처방이라 할 수 있는 대통령 탄핵 결정을 하기에 이르렀다. 총선에서 국민은 숫자를 앞세운 야당의 오만을 심판했다.

그러나 새 정치를 내세우면서 17대 국회에 진입한 180여명의 의원들은 이런 교훈을 철저히 외면했다. 멱살잡이와 욕설이 의사당에 흘러넘쳤다. 신악(新惡)이 구악(舊惡)을 뺨친다는 얘기가 나왔다. 상대방을 '수구꼴통''친북좌파세력'으로 부르는 원색적 색깔공세가 난무했다. 여기에 보안법 등 4대 입법을 둘러싼 갈등은 사회의 편 가르기 현상을 부채질했다. 대화와 타협, 관용과 조화는 구시대의 유물처럼 내팽개쳐졌다.

변화하지 않는 야당도 문제지만 정치력 없는 여당의 문제는 더욱 심각했다. 국회 의석의 과반수를 차지하고 국정을 책임진 집권당이 당내의 이견을 조정하지 못한 채 갈팡질팡했고, 야당에는 양보를 강요했다. 그러다 보니 여당 의원들이 당 지도부를 압박하기 위해 국회에서 농성하고 여당 출신 국회의장의 공관을 찾아가 시위하는 희한한 광경까지 나오게 됐다.

정치권은 100년 전의 과거사를 규명한다며 법을 만들기에 앞서 지난 한 해를 반성해야 한다. 미움의 정치, 오만의 정치에 대한 국민의 분노가 하늘에 닿았음을 뼈저리게 인식해야 한다. 그래야 새해에는 희망의 정치가 싹틀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