디커플링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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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6면

"한국 경제는 미국과 디커플링(decoupling·차별화)되고 있다."

월 스트리트 최고의 투자분석가 중 한사람인 스티븐 로치 모건스탠리증권 수석이코노미스트의 말이다. 미국 경제가 1분기에 6% 이상의 고성장을 했지만 소비위축으로 경기가 다시 나빠질 것이라는 이른바 '더블 딥(double dip)' 전망으로도 유명한 인물이다.

비단 로치가 아니라도 최근 우리 증권시장에서 가장 많이 쓰이는 단어 중 하나가 디커플링이다. 한국 증시가 미국 시장의 흐름을 그대로 좇아가던 커플링(동조화) 현상을 뒤엎는 흐름이 두드러진 때문이다. 돌이켜보면 자본시장 개방 이후 10년이 지나는 동안 미국의 힘은 갈수록 커져온 것이 사실이다. 지난해 말 현재 미국계 자본의 증권거래소 주식보유액은 50조원, 전체 외국인 보유액의 57%에 이르러 뉴욕이 기침을 하면 서울은 감기가 걸릴 정도였다.

그러나 6월 들어 미국 증시가 지난해 9·11 테러 이후 최저수준까지 곤두박질쳤지만 한국과 일본 등은 큰 영향을 받지 않았다. 특히 지난주 한국 증시는 매일 오름세를 타면서 거래소와 코스닥 주가가 모두 6% 이상 상승했다. 한국 경제를 밝게 보는 외국인들이 달러를 대거 들여오는 바람에 원화 가치가 올라 환율이 달러당 1천2백원선이 무너지는 상황까지 빚어졌다.

재정경제부 산하 국제금융센터의 분석에 따르면 이같은 디커플링 현상은 기본적으로 미국 경제의 힘이 빠진 데서 비롯됐다. 즉 미국 경제 악화→달러 약세→미국 증시 자금 해외 유출→미국 증시 약세를 거쳐 한국·일본·유럽연합(EU) 등이 나라별 사정에 따라 각개약진을 하고 있다는 것. 엔론·월드컴 등의 회계부정도 미국 경제의 또다른 자산인 신뢰를 허물어 이런 현상을 부추겼다.

따지고 보면 디커플링은 증시만의 현상이 아니다. 아들들의 스캔들에다 레임덕이 겹쳐 힘이 빠진 김대중 대통령에게 부패 척결과 중립내각 구성을 요구한 민주당 대통령후보의 행보에서도 디커플링의 고심이 엿보인다. 지난 정권에서도 비슷한 상황에 처한 대통령에게 집권당 후보가 탈당을 요구하는 등 차갑게 결별을 시도했었다. 미국 경제든, 한국 대통령이든 힘과 신뢰를 잃으면 어김없이 디커플링이 찾아온다. 그러나 한국과 미국 경제가 영원히 따로 놀 수 없듯 디커플링 역시 영원하지 않다. 한국의 디커플링 바람이 언제까지 지속될지 궁금하다.

손병수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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