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화 그리는 응암동 슈바이처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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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49면

도티기념병원은 서울 은평구청 건너편 응암동 언덕길 끝 야산 턱밑에 있었다. '만화를 그리는 슈바이처' 김진호(金眞浩·68)박사. 그는 이 병원에서 정형외과 과장으로 병원 옆에 있는 서울 소년의 집 고아 1천여명과 건강보험 납부금이 월 2만원을 넘지 않는 영세민을 치료한다.

도티병원은 미국인 사업가 도티(미국 거주)의 기부로 만들어진 공익병원이다. 그래서인지 여느 병원과 다른 분위기다. 시골 장터처럼 병원 복도는 복작거리고 시끄럽다.

명색이 정형외과·방사선과 등 진료 과목이 8개나 있는 병원이지만 복도에는 에어컨 대신 대형 선풍기가 털털대며 돌아간다.

진료 순서를 기다리며 복도 의자에 앉아 있는 환자들은 삶에 찌들 대로 찌든 모습이었다. 그들 대부분은 행려병자·무직자거나 일용직 근로자·파출부 등 극빈층이라고 병원은 전했다. 병원은 이들을 무료로 진찰한다. 입원도 무료다. 주사 한방씩에 천원 한장을 받을 뿐이다. 마침 중년의 수녀가 대여섯살짜리 아이를 데리고 병원에 들어섰다. 축구를 하다 무릎이 깨졌다는 아이는 주사기를 들고 총총걸음으로 복도를 지나는 간호사를 보자 더 크게 울음을 터뜨렸다.

크고 작은 소란을 지나 정형외과 진료실에 들어섰다. 한눈에도 만화를 좋아할 것 같은 밝고 순박한 얼굴의 그가 앉아 있었다. 영락없는 옆집 아저씨의 모습이다.

그는 서울대 의대 정형외과 전공의를 마친 뒤 서울대 의대 재활의학과장을 지내고 1990년부터 2년 동안 대한재활의학회 회장을 맡았다. 하지만 그가 2000년 8월 정년퇴임한 뒤 여기에서 일하고 있다는 걸 아는 사람은 많지 않다. 그의 의대 친구들이 지금 대학병원 원장이거나 서울 강남의 노른자위 지역에서 개인병원을 운영하는 상황에서 그의 은거(隱居)는 분명 흔치 않은 일이다.

사실 그는 82년 도티기념병원이 생길 때부터 일주일에 한번씩 병원에 나왔다. 병원 측이 직접 찾아와 봉사 요청을 해오자 가톨릭 신자로서 차마 거절하지 못했다고 그는 말한다.

"개원(開院)은 왜 안하시고…."

소박하게 웃으며 "실력이 없으니까 그렇지"라고 답한다.

"난 병원 운영 같은 건 못해. 병원 갖고 있는 친구들한테 물어봤더니 그거 나같이 셈 흐리고 흥정 못하는 사람은 평생 못할 짓이더라구. 그렇다고 내가 여기서 무료 봉사하는 것도 아니잖아. 월급을 얼마나 많이 받는데…."

정해진 근무시간은 화·목·토요일이지만 정형외과에서 하나뿐인 의사이기 때문에 거의 매일 호출을 받는다. 그가 진료하는 환자수는 하루 70~80명에 달한다. 두 평 남짓한 진료실을 둘러보니 어울리지 않는 소품(小品)이 눈에 띈다. 책장에 촘촘히 꽂힌 1백여권의 시·소설·수필집과 진료용 해머같은 의료기기와 나란히 있는 여러 종류의 붓 이 진료실이 틈만 나면 작업실로도 변신하다는 사실을 알려준다.

그는 어릴 적부터 혼자 그림 그리기를 좋아했다고 했다. 친구들과 밖에서 뛰어노는 것보다는 손에 잡히는 대로 아무데나 낙서하듯 그림을 그렸다는 것이다. 학교에서도 미술시간이 제일 좋았다고 말했다.

한국전쟁 중에 알게 된 한 미군장교가 그의 그림 취미를 알고 일본에서 사다준 미술도구 중 팔레트와 색연필을 그는 아직도 간직하고 있다. 어디에서 특별히 배운 것도 없고 누구로부터 지도를 받은 적도 없다. 그렇게 수십년 동안 혼자 그림을 그렸다. 심심풀이 삼아 그림을 그리던 그는 81년 5월 우연한 기회에 세상에 작품을 내놓게 됐다.

서울대병원 직원 식당이 하도 시끄럽기에 병원 사내보에 이를 풍자한 한컷짜리 만화를 그려 보냈더니 병원에서 이내 화제가 된 것이다. 이후 그는 한컷짜리 만화인 '함춘만평(含春漫評)'을 사보에 정기(매달) 연재하기 시작했다. 그의 정기 연재는 정년퇴임까지 20년 동안 한번도 빠짐없이 계속됐다. 그의 만화는 의료계 안팎의 호응과 화제 속에 『의협신보』『보건소직지』 등 각종 매체에 잇따라 등장했다. 지금도 그는 『의사신문』 등 3개 매체에 만화를 그려 보낸다.

후배들은 그가 서울대병원을 퇴직할 때 그의 작품을 문집으로 모아 선물하기도 했다. 이에 대해 그는 "어디까지나 아마추어의 것이라 볼품없는 것들인데 이를 인쇄해 놓으니 부끄러울 따름이지만 남들처럼 연구업적집을 내는 것은 더욱 자신이 없어 어쩔 수 없이 문집을 만들게 했다"고 말했다.

시사만평을 그리다보니 뜻하지 않은 '필화'(筆禍)사건에도 종종 휘말렸다. 의약분업같은 민감한 문제에서는 여러 군데에서 말도 많았고 일부는 병원 측 입장을 대변하고 홍보하는 소재가 너무 많다는 지적도 있었다. 하지만 그의 만화 속 주인공들은 투덜대는 듯하면서도 모나게 행동하지 않는다. 분노보다는 안타까움이 있고 신랄한 비판보다는 풍부한 해학이 있다. 세상에 대한 따스한 시선이 그의 만평의 기본 정서다. 그가 작품에서 다룬 의료계 애환과 병원에서의 에피소드, 심각한 시사 문제는 그래서 악의(惡意)가 없이 편하게 다가온다.

"그림을 왜 그리냐"고 묻자 그는 뜬금없이 "아이들을 한번 봐"라고 답했다.

"어쭙잖은 손짓으로 연필을 쥐고 무엇을 그리는지도 모르고 그림에 열중하는 아이들 말이야. 말 못하는 애들한테 그림 그리기는 하나의 의사표시 아닌가. 굳이 말한다면 나도 그런 셈이지."

그는 현재 아내(61)와 단둘이 산다. 아니 14세 먹은, 사람나이로 치면 98세가 됐다는 푸들 '레오'와 셋이 살고 있다. 1남1녀 중 아들(38)은 미국에서 공학을 공부하고 있고, 장녀(40)는 88년 수녀가 됐다.

"몰라. 딸애가 왜 수녀가 됐는지. 부모보다 하느님이 더 좋아서 떠났겠지. 처음에는 애 엄마가 4년 동안 딸애랑 얘기도 안 했어요."

강아지 '레오'는 그렇게 딸이 집을 떠난 뒤 새 식구가 됐다.

그의 생활은 단출하다. 술·담배도 못한다. 하루종일 진료하고, 그러다 짬이나면 그림을 그린다. 주말이면 부인과 함께 곧잘 스케치 여행을 떠나기도 한다.

그는 10여년 동안 정형외과를 맡았으면서도 가능한 한 칼을 쓰는 수술을 하지 않으려고 한다. 가령 허리디스크 환자는 수술이 최선이 아니라는 신념 때문에 단 한번도 디스크 환자에게 칼을 대지 않았다.

그는 "천성상 전공을 재활의학으로 바꾸기 잘했다"고 했다.

"아무리 중환자라도 아픈 데 보다 성한 데가 더 많다"는 게 그의 주의(主義)다. 무슨 뜻인가 재차 물었더니 "안 아픈 데가 적으니 병이 나을 가능성이 더 크다는 것"이라고 했다.

"환자한테 의사가 뭔가. 환자를 편하게 해주는 게 의사 아닌가. 환자의 아픈 곳을 쪼개고 부수고 다시 이어붙이고 하는 것보다는 의사는 우선 환자의 부담을 덜어줘야 하네. 환자만 만나면 검사부터 하자, 수술부터 하자는 젊은 의사들한테 꼭 해줄 말이 있지. 먼저 환자를 보고 만지고 아픈 데를 느끼고 환자들에게 나을 수 있다는 희망을 줘야 하네. 그 뒤에 검사나 수술을 해도 늦지 않지."

그제서야 그의 만화가 왜 그리 따뜻하게 다가오는지 알듯도 했다.

그의 그림에는 생략이 많다.대충 몇 개의 큰 선이 그림을 이루는 경우가 많다. "천성이 원체 게을러 자세히 못 그린다"고 했지만 그는 '단순함의 미학'을 알고 있었다. 복잡하고 지저분한 것은 지우고, 드러내놓고 싶은 것만 골라 도화지에 담는 삶의 지혜.

환자에게 칼을 대기보다는 아픈 곳을 매만져주고 함께 이겨내는 과정을 소중히 하는 의술인의 철학.

그 둘은 원래 하나였다. 의술(醫術)도 예술(藝術)이듯이.

글=손민호·사진=박종근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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