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352>제102화고쟁이를란제리로:1.브래지어속에금광이있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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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9면

㈜비비안 남상수(南相水·77·사진) 회장은 한국 여성 속옷사의 산증인이다. 산업화의 초기 국내 기업들이 너도나도 중공업에 몰두하던 시절, 여성 속옷 사업의 가능성을 읽고 1957년 비비안을 세워 한우물을 파면서 국내 속옷시장을 일궜다. 한눈을 팔지 않고 스타킹·팬티·브래지어 등 여성 속옷만으로 내실과 전문성을 다지면서 살아온 그의 일생을 통해 국내 기업들의 산업화 발자취를 더듬어 보고 교훈을 얻고자 한다.

편집자

나는 평생을 여성의 속옷에 목숨을 걸고 살아온 사람이다. 남들이 생각하면 별 우스운 사람도 다 있겠다고 하겠지만, 여성 속옷은 내 삶의 목표이자 철학이다. 나는 평생 동안 어떻게 하면 여성의 몸매를 아름답게 꾸밀 수 있을까를 고민해 왔다. 해방 후 1960년대까지 나는 국내와 홍콩을 오가며 이른바 '보따리 무역'을 하였다. 당시 보따리 무역을 하던 사람들을 흔히 '마카오 신사'라고 불렀다. 그 당시 나도 양복을 차려입은 멋쟁이에 속했다.

국제 도시인 홍콩에 자주 가다 보니 외국 여성들의 옷차림을 눈여겨 보게 되었다. 양장 차림이 정말 멋졌다. 볼륨 있는 가슴, 꽉 조여진 허리, 탄력 있는 히프로 몸매의 안정감을 잡아주면서 그 밑으로 쪽 뻗어 내린 두 다리까지, 그야말로 양장 차림은 여성의 몸매를 강조한 기가 막힌 디자인이 아닐 수 없었다.

한국에서 한복을 입은 여성들만 보아온 내 눈에는 서양 여성들의 그런 모습이 신선하게 느껴졌다. 물론 그 당시 한국의 개화된 여성들 사이에서는 더러 양장이 유행하고 있었다. 그러나 한국 여성들이 양장을 입으면 옷맵시가 별로 예쁘지 않았다. 그때 나는 깨달았다. 양장의 맵시를 제대로 내주는 것은 바로 여성의 몸매라는 것을. 바로 서양 여성들의 아름다운 몸매가 양장의 부드러운 곡선을 강조해주고 있었던 것이다.

그렇다면 여성의 몸매를 만들어주는 것은 무엇인가. 그것은 여성의 속옷이었다. 서양 여성들은 브래지어, 거들, 팬티, 스타킹 등 타이트한 속옷을 즐겨 입었다. 그러니 몸매가 저절로 아름다워질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당시 한국 여성들이 입던 속옷은 헐렁헐렁한 '고쟁이'여서 몸맵시가 나지 않았다. 그러니 아름다운 몸매가 가꾸어질 까닭이 없었다.

나는 한국 여성들도 서양 여성들처럼 아름다운 몸매를 갖게 해주고 싶었다. 앞으로 점점 더 한복보다 간편한 양장 차림의 여성들이 늘어날 것이고, 그러다 보면 한국 여성들도 몸매에 더 많은 신경을 쓰게 될 것이다. 그러면 몸을 꽉 조여주는 속옷이 필요하게 될 것이고, 수요공급의 원칙에 따라 여성의 속옷을 만들어 팔면 큰돈을 벌 것이란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나는 1965년 ㈜비비안의 전신인 남영염직 나일론 원단생산 공장 옆에 3층 건물을 짓고 의류공장을 차렸다. 당시만 해도 국내에서는 가내공업을 통하여 어설프게 여자의 브래지어나 팬티를 만들어 시장에 유통시키고 있었다. 국내 시장에서 디자인이 제대로 된 제품은 없었던 것이다.

나는 우선 국내 시장에서 유통되고 있는 여성의 속옷과 외국 제품을 비교해 보았다. 가내공업으로 만드는 국산 브래지어의 경우 3㎜ 정도 두께로 스펀지를 넣어 만들었는데, 너무 딱딱하여 마치 야구 글러브 같은 느낌을 주었다. 그러나 내가 외국에 나가 구입해온 브래지어는 아주 부드러웠고, 디자인도 깔끔하였다.

의류공장을 세우고 나서 가장 먼저 만든 것이 브래지어인데, 나는 우선 외국 것을 모방할 수밖에 없었다. 나는 외국에 나가 마음에 드는 브래지어 샘플과 카탈로그, 여성 잡지 등을 잔뜩 구입하였다. 그리고는 대학에서 가정학과를 나온 여사원을 뽑아 외국 제품을 보고 모방하여 브래지어를 디자인하게 하였다.

"야구 글러브를 가슴에 차고 다닐 수는 없다. 제대로 된 브래지어를 만들어라."

이것이 당시 내가 아마추어 여성 속옷 디자이너에게 주문한 내용의 전부였다. 신참내기 디자이너들은 열심히 브래지어를 디자인하였다. 그래도 눈썰미가 있어서 가내공업에서 만든 국산 브래지어보다 훨씬 세련된 디자인이 나왔다.

한국 여성의 몸매에 맞게 브래지어도 여러 가지 사이즈를 만들었는데, 한번은 황재청(黃在靑) 감사가 X-라지 브래지어를 머리에 썼는데 제대로 맞았다.

"브래지어를 만들라고 했더니 모자를 만들었군!"

그 말에 공장 직원들이 배꼽을 잡고 웃었던 기억이 난다.

아무튼 여성 의류 중 첫 제품으로 만든 브래지어는 65년 가을 국내 시장에 내자마자 불티나게 팔려나갔다. 브래지어 속에 금광이 들어 있었던 셈이다.

정리=이종태 기자

<필자 약력>

▶1925년 경북 영양 출생

▶64년 건국대 정경학부 상과 졸업

▶66년 일본 고베(神戶)대학 대학원 경영학과 수료

▶54년 남영산업 설립

▶57년 남영염직(현 비비안) 설립

▶70년 남영나이론 설립

▶76년 남영장학회 설립

▶85년 남영가공 설립

▶63~73년 무역협회 상임이사

▶73~94년 무역협회 부회장, 대한상공회의소 상임위원

▶91년 한일경제협의회 부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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