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아있는 리더십 '히딩크 신드롬'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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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1면

'히딩크 리더십' 에 대한 관심이 고조되고 있다.

주요 기업·연구소·대학 등에서 한국 축구대표팀 거스 히딩크 감독의 팀 운영을 '모범경영 사례'로 인정하고 그에게서 '멀리 내다보고 소신있게 이끄는 리더십'을 배우려 하고 있다. 지휘봉을 잡은지 1년5개월 만에 한국 축구를 한단계 업그레이드시킨 그의 업적은 분명 평가할 만하기에 그 내면에 무엇이 있는지 파악해 실제 기업경영에 적용하려는 붐이 일고 있는 것이다.<본지 5월 21일자 46면 참조>

삼성지구환경연구소는 28일 기업의 최고경영자(CEO)들이 참고할 수 있도록 '히딩크식 환경경영'이라는 보고서를 발간했다. 이 보고서는 ▶단기 실적에 흔들리지 않는 소신있는 리더십▶전력을 과학적으로 분석해 장점은 살리고 약점은 보완하는 시스템적 접근▶경쟁을 통한 실력 위주의 선수 선발 등을 우리 기업이 참고해야 한다고 지적했다. 삼성경제연구소도 이와 비슷한 내용의 히딩크 연구보고서를 준비 중이다.

한국외국어대 외국학종합연구센터는 히딩크 감독이 네덜란드 출신이란 점을 고려해 '네덜란드인의 리더십'이라는 연구에 들어갈 것을 검토하고 있다.

노명환 외국어대 교수는 "김병지가 경기 중 개인플레이를 하자 '한국의 대표 골키퍼'임에도 불구하고 가차없이 대표팀에서 제외했다가 잘못을 반성하는 기색이 역력하자 9개월 뒤 재기용하는 장면을 눈여겨 봐야 한다"며 "개인주의를 인정하면서도 합리적인 공동체주의를 강조하는 네덜란드인의 기질이 잘 드러난 대목"이라고 덧붙였다.

외환위기 이후 외국인 임원을 영입하는 등 외부 수혈을 단행하고 기준에 못미치는 직원을 과감히 퇴출한 은행들은 히딩크식 경영에 특히 공감하고 있다.

윤병철 우리금융그룹 회장은 27일 한 모임에서 "한국-프랑스 경기를 보며 CEO로서 여러 가지 생각을 해보았다"며 "축구협회가 학연·지연을 의식할 필요가 없는 외국인 감독에게 힘을 실어주고, 일정 기간 책임껏 경영할 시간을 준 것이 그런 성과를 거두게 한 요인"이라고 언급했다.

배석한 민유성 부회장도 "히딩크 감독이 체력 훈련을 중시한 것처럼 우리도 부실 채권을 정리하는 등 기초체력을 쌓는 데 더욱 힘을 쏟아야 한다"고 말했다.

박중헌 신한금융지주회사 업무지원실장은 "훌륭한 CEO 한명이 조직을 어떻게 바꿀 수 있는지 실감했다"며 "연공서열·파벌보다 실력을, 스타플레이어보다 조직을 중시한 데 주목한다"고 밝혔다.

삼성경제연구소의 윤순봉 전무는 "히딩크 리더십의 요체는 인사와 소신"이라고 규정했다.

선수기용·선발 등 자신에게 주어진 '인사권'을 최대한 활용해 자만에 빠지기 쉬운 스타급 선수들을 휘어잡는 강한 면모와 함께 이전의 한국인 감독들에게서는 찾아볼 수 없는 부드럽고 친근한 태도로 선수들을 대했다는 것이다.그러면서도 훈련은 엄했고, 자신이 설정한 기준치에 도달하지 못하는 선수는 네임 밸류를 따지지 않고 도태시켰다.

대표팀 성적이 바닥을 헤매고 주변의 비난이 쏟아질 때도 "훈련은 프로그램대로 충실히 진행되고 있다"며 흔들림이 없었다. 이 덕분에 선수들이 편안한 마음으로 히딩크를 믿고 따르면서, 그가 제시하는 단계별 훈련프로그램을 착실히 소화할 수 있었다는 얘기다.

김시래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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