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럼 文化 바꾸자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07면

얼마 전에 '문인들이 마구 양산되는 현 문화 상황을 우려한다'라는 부제(副題)로 모 문학지에 몇자 쓴 글에 대한 도하(都下)신문들의 큰 반향에 그 글의 필자로서 조금 놀랐는데, 오늘은 신문마다 매일매일 면수나 원고 분량까지 거의 획일적이다시피 쏟아내고 있는 칼럼에 대한 평소 생각을 몇자 언급해 볼까 한다. 바로 지금 그런 종류의 칼럼을 시론이랍시고 끄적거리고 있어 일말의 쑥스러움을 금할 수 없거니와, 우선 모든 신문의 편집 양태부터가 천편일률이란 점에서 필자 같은 사람은 강한 저항을 느낀다.

신문마다 기본틀 엇비슷

왜냐하면 바로 그 점에 문제의 원천적인 소지(素地)가 있어 보이기 때문이다.

사람의 생각이나 발상은 묘한 법이어서 모든 신문의 생김새와 기본틀이 똑같으면 본원적으로 생각이나 발상법부터가 거기서 거기로 똑같아지지 않을 수 없다. 그런 속에서도 서로 치열한 경쟁관계에 있으니 신문마다 타지와의 차별성에 역점을 두지 않을 수 없지만, 그게 어찌 쉬운 일일 것인가. 신문은 기본적으로 이러이러하게 생긴 것이다라는 기본틀에 아주 고정관념으로 매여 있는 한 제작진의 발상법부터가 그 기본 테두리에서 멀리 벗어날 수 없을 것은 당연하다.

그리하여 제작진부터가 기껏 안달하며 신경을 쓰는 것이 고작 시론이며 뭐며 하는 칼럼들이며, 그쪽의 좋은 필진 확보에 혈안이 될 수밖에 없다. 하지만 그런 쪽으로까지 신문마다 짜잔할 정도로 똑같이 신경을 쓰다 보니 그런 노력마저 차별화는커녕 어느새 획일화에만 플러스 알파로 더 작용하고 있는 듯이 보인다.

바로 그렇게 신문마다 매일매일 쏟아내는 그 칼럼들인즉 지난 50년간 글을 써온 필자같은 사람이 일괄(一括)해서 보기에는 꽤나 문제가 많아 보인다. 문장의 됨됨이 같은 것은 논외로 치고라도, 그냥저냥 하나마나한 소리, 시정(市井) 속 누구나가 뻔히 알고 있는 수준의 소리, 심한 경우 더러는 '그 글을 그렇게 쓰는 그 필자의 뒷속셈'같은 것부터 흘낏 들여다 보이기도 하는 경우마저 없지 않다.

물론 오늘같은 민주사회에서 소위 각계의 다양한 여론을 골고루 다루는 것은 필수적일 터이지만 양질의 필자 찾기가 왜 대학교수 같은 지식인 쪽으로만 몰리고 있는가. 같은 글을 쓰더라도 쉽게 쓸 수 있는 사람이 허다하게 널려 있을 것 같은데, 어째서 골라골라 어렵게 쓰는 사람들 쪽으로만 눈길이 가 있는가.

언론과 대학의 '유착관계'라고까지 거창하게 거론하고 싶지는 않지만 필자가 보기엔 이 문제는 그냥 간단하게 넘길 문제는 아닌 것 같다. 그야, 실제 국면으로 충분히 이해는 된다. 어떤 문제가 터진다, 그런 쪽의 글을 부탁할 전문가를 찾는다, 그렇게 대학쪽을 기웃거린다. 이런 수순은 당연할 것이다.

하지만 이런 국면으로만 백년하청으로 안주해 있다 보면 대학의 연구실에서 연구에만 골몰해 있던 교수나리들께서 슬슬 딴 욕심이 동할 수가 있는 것이다.

집필진 다양화 노력을

작금에 신문마다 온통 뒤덮고 있는 이야기들에서도 보이듯이 본시 별 사람이 따로 없는 것이다. 그런 쪽의 기회가 주어지면 천하 없어도 마음이 동하게 돼 있는 것이 사람이다. 애당초 그런 기회와 맞부닥치지를 않아야 한다.

이런 쪽의 국면까지 널리 깊이 이모 저모 살필 틈이 제작 실무 전에야 애당초에 있겠을까마는 신문 제작진 핵(核)부분의 저어 깊은 안자락에는 모름지기 이런 정도의 지혜와 슬기가 본원적으로 자리해 있었어야 하지 않을까.

필자는 앞에서 "그 글을 그렇게 쓰는 그 필자의 뒷속셈 같은 것부터 흘낏 들여다 보이기도 하는 경우마저 없지 않다"라고 감히 썼는데, 이건 50년간 글을 써온 사람 특유의 노회한 시선이라고 할는지는 모르지만 제작진 쪽에서는 이런 테두리까지 안자락으로 깔고 있어야 할 것이다.

요컨대 문인만 양산되고 있는 것이 아니라 칼럼 집필자도 너무 무분별하게 양산 추세에 있어 보인다.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