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335>제101화 우리서로섬기며살자:34. 본격 선교활동 시작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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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4면

집을 짓는 일이 급선무였다. 적극적인 선교활동을 위해서는 많은 사람이 드나들 수 있는 공간이 필요했기 때문이다. 장차 미국에서 파송될 기독봉사회 선교사들이 머물 자리도 필요했다. 수원 지역을 두루 돌아다니다가 인계동의 땅 1천2백평을 평당 30원에 사들였다. 땅을 많이 산 이유는 미국쪽의 지원이 끊어질 경우 과수원으로 가꾸어 자급을 해야겠다는 판단에서였다.

지금은 수원의 중심가가 되었지만 당시 인계동 우리 집 주변은 허허벌판이었다. 아래쪽에 집이 몇 채 있었지만, 소리쳐도 들리지 않을 정도로 완전히 외딴 집이었다. 버스가 다니지 않은 것은 물론이고, 수도도 집을 지은 지 20년 후에야 연결될 정도로 변두리였다.

1백평 대지에 건평 28평짜리 집을 지을 때, 설계는 미국에서 온 매카피 선교사가 대충 하고 집을 짓는 일은 수원교도소 모범수들이 맡았다. 귀국하자 마자 교도소를 정기적으로 드나들며 하나님 말씀을 전했는데 모범수들이 그 은혜를 갚겠다며 자청한 것이다. 당시에는 모범수들이 농촌 일손을 많이 도왔다.

자재값만 들여 비전문가들이 힘을 합해 지은 집은 처음부터 많은 문제를 일으켰다. 구들장을 제대로 놓지 못해 온 가족이 연탄가스를 마시고 병원신세를 진 것만도 일곱 번이나 됐다. 또 워낙 외진 곳이라 도둑이 네 번이나 들어 전축도 가져가고 선교비를 훔쳐 가기도 했다.

일년에 한 번씩은 꼭 크게 수리를 해야 할 정도로 집은 부실했지만 그래도 공간이 넓고 서구식이어서 생활하기엔 편리했다. 우리 집을 드나들던 미군이 일본출장을 다녀오면서 사온 펌프를 우물에 연결해 양변기를 사용했다. 초가집에 살 때부터 우리집에는 학생들이 많이 몰려들었다. 성경을 배우기 위해서였다. 이제 집이 넓어져 학생들을 마음놓고 부를 수 있어 좋았다. 집안이 가난해 학교를 못 다니거나 예수 믿는다고 쫓겨난 학생들은 아예 우리 집에서 살았다.

미국 여자와 결혼한 선교사가 수원에 왔다는 소문이 오산 미군 부대까지 퍼져 설교를 해 달라는 요청이 왔다. 미군 부대 설교를 계기로 미군들이 수시로 인계동 집을 드나들며 아내가 만들어준 음식을 먹으며 향수를 달랬다. 집을 드나드는 사람이 많으니 아내의 고생은 이만저만이 아니었을 텐데도 불평은 없었다. 모든 고생이 다 선교를 위한 것이라고 생각하는 아내가 고마울 따름이었다.

나는 미국 유학 시절 전도 여행을 다니면서 미국 내 여러 십대선교회(YFC) 지부에서 일한 경험을 살려 귀국 1년만인 1960년 12월에 수원 YFC를 창설했다. 그보다 1년 앞서 길치수 목사에 의해 창설된 서울 YFC에 이어 한국에서 두 번째였다.

그리고 각 고등학교 교장들을 만나 학교 강당에서 토요 집회를 열 수 있도록 해달라고 당부했다. 당시 학생들이 여가활동을 할만한 게 별로 없던 터라 교장들은 선뜻 허락해 주었다. 준비과정에서 학생회장들을 자연스럽게 접촉해 그들을 전도했다. 학생회장을 전도하면 대개 그 아래 조직은 저절로 전도가 된다. 그래서 나의 전도방법을 주변에서는 피라미드식 전도법이라 말하곤 한다.

주말이면 각 학교 강당을 빌려 대규모 집회를 열었는데 미국 YFC 노래사절단 '틴팀'과 흑인 합창단 등이 와서 학교를 돌며 공연을 하고, NBA 출신 농구 선수들로 구성된 선교 농구단이 농구를 한 다음 트럼펫을 불었다.

나는 미국에서처럼 학생들에게 간증을 하면서 복음을 전했다. 가난한 어린 시절과 미국에서의 힘든 유학시절을 얘기하고 청소년들에게 희망을 품으라고 설교했다.

집회가 끝나면 세미나·퀴즈대회·스포츠·드라마 등 각종 선교 프로그램으로 학생들을 사로잡았다. YFC 집회는 초창기부터 1천여명의 학생들이 모일 정도로 폭발적인 인기를 끌었다.

평일에는 수원시내 우시장을 비롯한 장터를 돌아다니면서 곡마단처럼 마이크를 설치하고 음악을 연주하며 전도를 했다. 미국에서 온 음악팀과 함께 나가기도 하고 YFC 활동을 돕는 대학생들과 함께 나갈 때도 있었다. 처음에 사람들 앞에서 연설을 할 때 나는 한국말이 잘 나오지 않아 통역을 세우기도 했다. 한국어는 귀국하고 1년여가 흘러서야 겨우 내 뜻대로 구사할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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