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삶의 향기

허황, 정대세, 미셸 위

중앙일보

입력

업데이트

지면보기

종합 33면

북한 축구대표 정대세가 뜨거운 눈물을 쏟아내는 것을 보며 문득 그 옛날 북한으로 떠난 허황이 떠올랐다. 허황은 살아있을까. 살아있다면 64세. 그러나 오랜 세월 소식을 듣지 못했다. 북한 대표팀이든 북한 바둑 어디에도 허황의 이름은 없었다. 아무래도 순수하기 짝이 없던 그의 꿈은 무참히 깨진 듯 보인다.

정대세는 다르다. 그는 성공한 선수고 꿈을 이뤄가고 있다. 한데도 이들의 눈물이 비슷하게 다가온 건 웬일일까. 일본동포는 미국 동포와 크게 다르고 중국 동포와도 다르다. 미국에 이민 가면 누구나 미국 시민권을 따내기 위해 애쓴다. 미국 시민권은 자랑이다. 미국과 동화되는 것은 당연하다. 그러나 일본 동포들은 일본 국적을 얻기 위해 애쓰지 않는다. 대신 어려서부터 한국어를 배우며 정체성을 잊지 않으려 애쓴다. 중국에 있는 조선족 2세들은 태반이 한국말을 모른다. 그들은 스스로를 중국인이라 생각한다. 그러나 일본 동포 정대세나 안영학은 한국말을 잘한다. 이들은 자기 자신을 영원한 한국인이라 생각한다. 남이냐, 북이냐는 큰 의미가 없다. 그렇다. 정대세가 일본 시민이 될 일은 아마도 영원히 없을 것이다. 여자 골프선수 미셸 위가 미국 국적인 것, 미국 대표로 경기하는 것, 얼굴에 성조기를 그려 넣는 것은 너무도 당연해 보이지만 정대세가 일본 국적을 얻어 일본 대표선수로 나서는 것, 얼굴에 일장기를 그려 넣는 광경은 상상할 수 없다.

온갖 차별과 냉대 속에서도 많은 재일 동포들이 한국 또는 북한 국적으로 살아왔다. 정대세는 한국 국적이지만 우여곡절 끝에 북한 대표로 출전했다. 4개 국어를 한다는 정대세가 왕따 신세의 북한이란 나라를 모를까. 하지만 못난 아비라도 부모이듯 못난 조국도 조국이다. 사랑해야 한다. 정대세는 그렇게 교육받으며 자랐을 것이다. 역사의 덫에 붙들린 자신의 억울하고 고달픈 숙명을 감지하면서도 당당히 맞서자고 결심하며 살아왔을 것이다. 정대세는 그래서 울었다고 나는 생각한다. 화려한 파티장에 국가가 울려 퍼지는 순간 ‘불쌍한 조국’에 대한 미움과 연민, 초대받지 못한 손님 같은 자신의 신세와 끓어 오르는 투혼이 한데 엉키며 폭포 같은 눈물로 터져 나왔다고 생각한다.

축구 선수 정대세의 눈물과 프로기사 허황의 눈물, 그 위로 미셸 위의 환한 미소가 오버랩된다. 다 같은 해외동포지만 참 다르다. 고국의 땅을 밟으면 곧바로 죽어도 좋다고 했던 19세 청년 허황. 그가 훗날 일본으로 몇 번인가 후회하는 편지를 보내왔다는 소식이 가슴을 더 쓰리게 만든다.

박치문 바둑전문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