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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로호 세대’를 위하여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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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0면

이토카와 히데오(糸川英夫·1912~1999)라는 일본 과학자가 있다. 그에게 꿈을 심어준 사람은 미국인 찰스 린드버그였다. 1927년 린드버그가 대서양 단독횡단 비행에 성공했을 때 이토카와는 중학생이었다. 엄청나게 감동 받은 소년은 “커서 내 손으로 비행기를 만들겠다”고 결심했다. 고교 졸업 후 도쿄대 항공학과에 들어갔다. 대학을 마치고 나카지마 비행기(현 후지중공업)에 입사했을 때 군국주의 일본은 전쟁 중이었다. 나카지마 비행기에서 이토카와는 재능을 발휘했다. 일본 해군에 ‘제로센’이 있다면 육군의 전투기는 ‘하야부사(<96BC>·매)’였다. 1945년 패전 때까지 주력기로 쓰인 ‘하야부사’의 설계자가 바로 이토카와다. 그는 가미카제 특공대에 반대해 “사람이 타지 않는 무인 전투기를 개발하자”고 군 수뇌부에 건의한 적도 있다.

패전 후 도쿄대 공학부에 돌아온 이토카와는 의료기기 개발에 빠져들었다. 뇌파진단기와 마취측정기를 발명했다. 그 즈음 미국 시카고대에서 마취에 관해 강연할 기회가 생겼다. 강연을 마치고 대학 의학부 도서관에 들렀다가 ‘우주 공간에서의 인체 변화’를 주제로 한 논문을 읽게 됐다. 이제 미국은 곧 우주시대에 접어들겠구나, 라고 직감했다. 귀국 후 로켓 개발에 뛰어들었다. 1955년, 이토카와는 길이 23㎝, 직경 1.8㎝, 무게 200g의 조그마한 로켓 발사에 성공했다. 고체 연료를 사용한 일본 최초의 로켓은 생긴 모양대로 ‘펜슬(연필)’이라는 이름을 얻었다. 1970년 일본의 첫 인공위성(오스미) 발사 성공도 그 덕분이다. 이토카와가 ‘일본 로켓의 아버지’로 불리는 이유다. 그는 첼로 연주를 즐겼고 고음이 뛰어난 바이올린을 직접 만들었으며, 62세부터는 발레에 빠져 67세에 ‘로미오와 줄리엣’의 몬태규 백작 역으로 데뷔했던 다재다능한 과학자였다.

이토카와의 ‘꿈’은 후배들이 이어받았다. 그가 죽기 1년 전인 1998년 미국 탐사팀이 지구와 화성 사이 궤도를 도는 소행성을 발견했다. 일본 과학자들은 2003년에 이 소행성을 탐사할 ‘하야부사’를 발사한 뒤 미국 측과 교섭에 나섰다. 미국의 호의로 뒤늦게 소행성에 ‘이토카와’라는 이름을 붙이게 됐다. 나는 일본이 2차대전 당시 미군과 수많은 공중전을 벌인 전투기 ‘하야부사’를 탐사선 이름으로, 목적지인 소행성을 하야부사 전투기의 설계자인 ‘이토카와’로 명명한 데 대해 뭔지 모를 섬뜩함을 느낀다. 이미 1920년에 비행기를 만들었던 일본의 저력과 패전의 한(恨), 그리고 세월을 뛰어넘는 집요함이 한꺼번에 엿보이는 것이다.

그 하야부사가 지난 13일 기적적으로 귀환했다. 하야부사의 본체는 경차 절반 크기에 불과하다. 그 게 저 먼 우주에 떠 있는, 길이 540m 짜리 땅콩 모양의 바윗덩어리에 착륙했다가 돌아왔다. 7년간 무려 60억㎞. 캡슐을 호주 남부 사막을 향해 떨어뜨린 뒤 본체는 장렬히 ‘산화’했다. 일본 열도가 월드컵축구 첫 승리를 뛰어넘는 환호에 젖는 것도 당연하다.

나로호 발사가 두 번이나 실패했다지만 이제 시작이다. 우주개발은 꿈과 함께 ‘실패’를 먹고 자란다. 어느 나라든 우주 개척사는 축적된 실패학(失敗學)의 집대성이다. 우리는 단 두 번의 작은 실패에 너무 실망하는 것 아닌가. 일본의 이토카와, 중국의 첸쉐썬(錢學森)에 비견될 ‘한국형 로켓의 아버지’들이 우주개발의 꿈과 함께 무럭무럭 커가고 있다고 나는 확신한다. 나로호의 꿈과 초기의 실패를 보고 자란 ‘나로호 세대’다. 우리나라의 미래는 싸움박질에 정신 없는 기성세대보다 그들에게 달려 있다고 나는 믿는다.

노재현 논설위원·문화전문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