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경제규모 세계 12위라는데…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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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9면

미국 로스앤젤레스에 사는 동포 K씨는 한국에 오기 전에 미리 달러를 우리 돈으로 바꾸려고 국내은행 로스앤젤레스 현지 지점을 찾았으나 헛걸음을 하고 돌아섰다. 바꿔줄 원화가 없으니 한국에 가서 환전하라는 얘기였다.

K씨의 불만은 또 있다. 한국에서 미처 다 쓰지 못한 원화를 미국에 가져갔을 경우 이를 달러로 바꿀 방법이 없다는 것이다. 이 때문에 K씨는 한국을 다녀갈 때마다 남은 원화를 다음번 한국방문 때까지 고스란히 집에 보관했다. K씨는 "국외에서 환전이 안되는 것도 불편하지만 한국 경제의 규모가 세계 12위라는데 원화는 왜 그만한 대접을 받지 못하나 하는 의문이 더 크다"고 말했다.

◇원화 국제화의 현주소=한마디로 원화는 아직까지 국제통화로 인정받지 못하고 있을 뿐더러 앞으로도 상당기간 국제무대에서 결제수단으로 쓰일 가능성은 거의 없다.즉 한국 땅을 벗어나서는 화폐로서의 쓰임새가 거의 없다는 얘기다.

한국은행 국제국 외환운영팀의 서봉국 조사역은 "환전의 편의성이나 경상거래의 결제수단으로 원화의 위상은 국제통화라고 하기에는 턱없이 낮은 게 현실"이라고 말한다.

실제로 지금까지 해외에서 원화의 환전이 거의 불가능했고, 수출입 대금 중 원화로 결제되는 비율도 2~3%에 불과하다.

월드컵을 앞두고 이번에 겨우 5백억원을 내보내 환전에 따른 불편을 덜겠다는 것이 그나마 나아진 대목이다.

◇국제화 왜 안되나=정부는 1993년 원화의 국제화 방안을 내놓고 일부 제도를 바꿔 외국인의 원화 보유를 확대했다. 외국인이 국내에 증권이나 부동산 투자를 위해 들여오는 달러를 원화로 바꿔 가질 수 있도록 허용하고, 그 한도를 계속 늘려왔다. 그러나 원화를 해외로 내가는 것만큼은 아직까지 엄격하게 규제하고 있다. 1만달러어치를 넘는 원화를 나라 밖으로 가져가려면 한국은행의 허가를 받아야 한다. 이번에 은행들이 해외로 가져가겠다는 환전용 돈다발은 모두 한국은행의 별도 승인을 받은 것들이다.

정부가 원화의 해외반출을 꺼리는 것은 환 투기에 대한 걱정에서다.

"2001년 2차 외환자유화 때까지 풀 수 있는 규제는 거의 다 풀었습니다. 그러나 원화의 해외반출과 외국인이 원화로 돈을 빌리는 것만큼은 규제하고 있습니다. 국제통화기금(IMF)도 아무런 반대가 없습니다. 환 투기 우려에 대해 공감하고 있다는 얘기지요." 윤여권 재정경제부 외환제도과장의 말이다.

바트화의 국제화를 추진하던 태국이 97년 외환위기 때 호되게 환투기의 피해를 본 후 규제로 돌아섰고, 개방화를 자랑하는 싱가포르도 외국인이 싱가포르 달러로 돈을 빌리는 것은 제한하고 있다는 것.

◇어떻게 해야 하나=한은 서봉국 조사역은 "통화의 국제화라는 것이 우리가 하고 싶다고 (외국에)권해서 되는 게 아니다"고 말했다.우리나라의 경제력과 위상이 국제사회에서 충분히 커져 그 결과로 원화를 찾는 수요가 해외에서 늘어나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환전과 외국인의 국내투자 등에 불편이 많은 상황에서 원화가 국제적으로 통용되도록 좀더 노력해야 한다는 의견도 많다.

외환전문가들은 "현재로선 미국·유럽연합·일본 정도의 덩치가 아니고서는 자기 나라 돈을 해외에 풀어놓고 환 투기의 위협에서 자유로운 나라가 없다"며 "그러나 언제까지나 '우물안 개구리'로 남을 수 없는 만큼 보다 전향적인 자세로 원화의 국제화를 추진해야 한다"고 지적했다.

김종수 기자

원화의 국제화 추진 일지

1988.3 2백만원 이내 원화 휴대 수출입 허용

88.11 원화표시 수출입 거래 허용(신용장)

91.6 원화표시 무역외 거래 허용

92.9 원화표시 자본거래 허용

93.10 건당 10만달러 이내 수출입 원화 결제 허용

94.6 건당 30만달러까지 원화 결제 확대

95.2 3백만원 이내 원화 휴대 수출입 허용

96.6 경상거래에 대한 원화 결제 금액제한 폐지

원화 휴대 수출입 허용한도 1만달러까지 확대

자료:재정경제부·한국은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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